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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1년]개인의 비전은 경험적이다. 선험적이지 않다

"유토피아의 모습은 한 몽상가의 ‘비전’ 속에서 미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투쟁하는 세대의 집단적 꿈속에서 ‘기억’으로 뒤늦게 현현하는 것이다." 진중권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61581&page=2&mm=100000005

 

 

 

 

개인적 비전이 선험적이 아닌 경험적이어야 한다는 아이디어와 결합될 만한 구절이다.

 

 

성경에 나온 비전이 아니라면,

모든 것을 겪은 이후에 그것이 비전이었노라고

경험적 선언을 하는 것이 더 정직하고 안전하지 않을까.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비전 타령이 있던가

 

"주님이 이 여인과의 결혼 비전을..."

"유학에 대한 비전을 주셨..."

"사시에 붙어 대한민국 법조계에 빛과 소금이 되는 비..."

 

예수의 재림, 육체의 부활, 천국과 지옥의 존재.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지 않다.(천국과 지옥 갔다 온 사람 손들어 봐)

이것들은 말씀의 로고스를 신앙하는 속에서 알 수 있는,

선험적 지식들이다.

 

헌데 그 외의 것들.

개인의 입신, 출세, 결혼, 건강, 부 등의 사안들에 대해

성경에는 뚜렷한 말이 없다.

그리고 개인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일일이 "미리"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다.

인도는 비전의 현시와 구조적으로 동행하지는 않는다.

때때로 보여주실 때도 있겠으나 그것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불확실함의 안개 속으로 하나님의 손에 손목 잡히어 동행하는 스릴을 외려 성경은 부추긴다.

몰라도 함께 가는 그 짜릿함.

 

 

다 겪은 후에, 결혼을 겪은 후에, 유학을 다녀온 후에, 법조인으로 살아본 연후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주님의 은혜로운 인도였다고 ,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비전이었고 나는 그것에 참여했던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그렇게 고백할 여유와 진득한 인내를

기독 청년들에게 바랄 수 없는 것일까.

 

비전에 대한 박약하고 조야한 신학적 인식이 가벼운 인격과 결합되어

욕망을 욕망이라 부르지 못하고 비전이라는 외피로 호도하는

이 시대의 희비극적 맥락이 탄생하는 것이리라.

 

그냥 나는 이것이 좋다, 이 길이 좋다, 이것을 욕망한다!고 말하는 게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셨어요!라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보다

훨씬 건강하다.

욕망이고, 욕구라면 적어도 그것을 점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전이라면? 감히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