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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1년]김두식의 “평화의 얼굴” 비판 :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하여

 

김두식 경북대 교수. 그는 가독력 높은 필체로 여태껏 진보 진영이 견지해왔던 여러 주장들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사이다. 그를 두고 누구는 주목할 만한 기독교 지성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 평가에 반대한다. 첫째, 그의 주장은 새로울 것이랄 게 없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존 하워드 요더의 말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여 소개하는 것이요 동성애를 정상적 성취향의 하나로 바라보는 이야기는 이미 익숙한 내러티브이다. 게다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법적 옹호, 그리고 대형 교회 비판도 수없이 다뤄져 오던 테마들이다. 단지 김두식은 그것들을 매우 쉽게 – 그래서 근거 구성이 성기기도 하지만 – 종이에 옮긴 것뿐이다. 그의 업적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언어로 누군가 이미 질러 놓은 내용을 번역하는 일 또한 탁월성이 요구된다. 하지만 지성? 그는 집필 작업에서 분명 자신의 지성을 사용했겠으나 그를 기독교적 지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망설여진다. 전술한 이유 때문에.

 

둘째, 위에서 스치듯 언급했지만 그의 주장을 이루는 근거들이 너무 빈약하고 허술하다. 이성과 논리에 의지하기보다는 감성과 역사에 막연히 호소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더 많다. 읽다보면 민망할 정도로 부서진 논리적 일관성이 목격된다. 논리의 내적 일관성뿐만이 아니다. 그가 들어놓은 신학적 근거라는 게 이미 오래 전에 반박된 것들이다. 그런데도 마치 새롭고 신랄한 근거의 제시인 양 예쁜 표지의 책에 활자로 박혀 있는 것을 보면 솔직히 나도 헷갈린다. 그리고 많이 팔린다. 그럼 더 혼란스럽다. 감정이 합리적 인식을 압도하는 순간이리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주장과 근거가 심정적 동의와 사회 개혁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지언정 논리적, 신학적으로는 모순과 부적절함 투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김두식은 한국 사회의 그림자를 들춰내어 대중들의 문제 의식을 일깨웠다는 데서 매우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 특히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표현의 자유, 법조계의 비리 등 한국 사회의 불건정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대중적 각성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스스로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복음주의권 기독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김두식을 칭찬하는 목소리는 사방에 깔렸다. 그럼 이 글에서 김두식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그렇게 부적절한 처사는 아닐 게다. (이 글에서 기울임꼴로 쓰여진 부분은 모두 김두식의 저서에서 직접 인용한 것들임을 밝혀둔다)

 

논리상의 오류에 대해

 

먼저 다룰 분야는 김두식의 기독교 평화주의다. 그의 저서 “평화의 얼굴”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견해이다. 모든 전쟁에 철저히 반대(평화주의)하되 그 반대의 근거가 예수의 가르침(기독교)이다. 이것이 기독교 평화주의의 요점이다. 김두식은 먼저 평화주의에 가해졌던 도덕적 공격을 분쇄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한 양심적 병역거부(또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의 부당함을 이야기한다.

 

“강도가 네 여동생을 강간하고 죽이려 해도 가만히 있겠느냐?”는 식의 질문을 …평화의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평화주의자라면 저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게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가 이 질문을 회피하려 무리한 추상화를 시도한다는 사실이다.

 

이 질문은 사실 제대로 된 질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덫’입니다.

 

벌써 징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쓴 ‘덫’이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대답하기 곤란하다’의 다른 표현이다.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이란 말이다. 그럼 이런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게 잘못인가 아니면 답하지 못하는 게 잘못인가? 둘 다 잘못이 아니다. 가정적 상황을 설정하는 질문은 몇 가지의 철학적 문제에만 집중하도록 현실의 구체성을 잠시 접어둔 채 사유의 공간을 마련한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그것이 재판장에서 악의적으로 인신을 공격하기 위한 맥락 가운데 사용된다면 문제이겠으나 그 질문 자체는 평화주의라는 이념을 점검하기 위한 철학적 검증의 적절한 방편이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리주의의 도덕적 모순을 꼬집기 위해 소개한 예화가 있다. 어슐러 르 귄이 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허구적 이야기다. 오멜라스에는 왕과 노예도, 광고와 주식거래도, 원자폭탄도 없는 곳이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이 오멜라스의 공공건물 지하실에 잠겨있는 방이 있는데 거기엔 한 아이가 갇혀 있다. 그 도시의 행복과 아름다움과 우정과 건강, 곧 모든 공공선이 지하실에 갇혀 있는 아이를 통해 가능하다는 개연성 떨어지는 환상적 이야기다. 공리주의의 논리대로라면 그 아이는 계속 그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 벤덤식 공리주의는 철저히 쾌와 불쾌간의 양적 차이를 저울질함으로써 도덕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그런 것을 – 아이가 갇혀 있는 것이 옳다 – 대담하게 옹호하겠는가? 여기서 도덕적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듯 허구의,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비논리적인 상상”의 가상적 상황을 설정해 질문으로 만드는 것은 철학적으로 널리 쓰이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의 적합성은 공리주의를 논파할 때 그것이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를 배태시키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진지하게 견지해오던 신념을 반성하고 수정을 가하거나 아예 폐기하면 된다. 도덕적 딜레마의 질문자는 철저한 철학적, 도덕적 검증을 시행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잘못된 점이 없고, 대답하는 이는 그 딜레마를 풀거나 풀지 못할 경우 솔직한 철학적 반응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지성을 증명하게 된다. 따라서 “오직 가정에 불과한 이야기를 이용해” 평화주의의 맹점을 지적하고 부당함을 논증하는 시도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곤란한 질문이 철학적 검증에 꼭 필요한 과정이란 걸 무의식적으로 인식했는지 김두식은 곧바로 화제를 돌린다. 여동생을 강간하려는 상황에서 발동하는 정당방위와 국가간의 전쟁은 본질상 상이하다는 것을 보이려 애를 쓴다. 그리고는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이 지니고 있는 평화주의와의 논리적 연결고리를 끊으려 한다. 정당방위와 전쟁의 차이를 설명하는 그의 요지는 전쟁에서는 무죄한 자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럼 무죄한 자를 죽이지 않는 전쟁은? 철저한 방위적 전쟁, 민간인을 제외하는 전쟁, 이러한 전쟁은 여동생을 강간하려는 강도에 폭력으로 맞서는 정당방위와 도덕적 본질을 공유하지 않는가? 거기에 김두식은 이렇게 답한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은 ‘언제나’ 무고한 양민들입니다. 

 

지금 김두식은 범주 오류를 겪고 있다. 김두식이 애초에 반박하려 했던 것은 “오직 가정에 불과한”, 여동생이 강간당할 위기의 순간이다. 이러한 가정적 상황에 김두식은 갑자기 “역사상 모든 전쟁”을 언급하며 지극히 평범한 범주 혼동을 일으킨다. 기실 그가 언급한 것은 미국의 불의한 전쟁이었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와의 전쟁, 달랑 두 개다. 그리고는 “역사상 모든 전쟁”이라는 장엄한 수식어를 붙이며 정당방위와 전쟁간의 논리적 공유지점은 없다고 못박는다. 참으로 대범한 비약이다. 여동생이 강간당할 상황에서 정당방위의 이론을 본 게 김두식이라면, 마찬가지로 전쟁이라는 상황이 이론적 견지에서 정당방위로 귀결될 수 없는 것인가를 논증하는 것이 수순이다. 그럼으로써 정당방위와 전쟁 사이에는 논리적, 도덕적 유사점이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게 온당한 지적 경로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적 범주 하에서의 논쟁을 생략하고 역사적 전쟁의 예로 진입하는 것은 허공에다 말뚝을 박는 논리적 비약일 뿐이다.

 

뒤에서 김두식은 정전론을 논의한다. 즉 전쟁에 대한 이론적 점검인 것이다. 김두식은 이 점검에서 정전론이 기독교적 관점을 배제한 전쟁이론으로서는 가능하다는 입장을 암시한다.[1](과연 기독교적 입장에서 정전론이 수용될 여지가 없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뒤에서 하겠다.) 그리고는 정전론의 요소를 만족시키지 못한 역사적 사례와 만족시킬 수 없는 현재적 조건을 제시한다. 이미 벌어진 전쟁들 또는 현재 진행되는 전쟁을 판단하는 것은 단순한 추론적 검토를 넘어서는 현재적,역사적 사실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이 말인즉 정전론을 이론적으로 승인하는 동시에 그것이 역사 속에서 실현 되어 오지 못해왔다는 역사적 판단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모든 전쟁이 필연적으로 불의할 수밖에 없다면? 이것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을 추론하는 이론적 검토이다. 그리고 미래 모든 전쟁의 필연적 불의성을 증명하는 추론적 시도의 설득력은 정전론을 논파할 만한 파괴력을 갖지 못한다. 도래할 미래의 역사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낡은 역사 철학의 미시적 구현은 잠깐의 지적 유희로 족하다. 요컨대 전쟁을 규정하는 이론은 정전론이라는 정태적 이론과 불의한 전쟁의 필연성이라는 추론적 이론으로 나눌 수 있겠다. 김두식은 둘 다를 긍정하면서 정전론에 대한 현실적 거부를 단행한다.

 

만약 이렇듯 정태적 이론으로서 정전론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불의한 전쟁에 대한 추론적 이론이 빈약한 것이라면, 정당방위와 전쟁의 논리적 공유지점은 확보된다. 게다가 군대의 존재 자체가 전쟁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고, 또 국지적인 전투에서는 민간인이 아닌 군인간의 교전만이 이뤄지는 것도 분단 한국의 휴전선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군대 자체를 거부하는 집총거부의 논리적, 철학적 근거는 소멸된다.(그래도 자신의 세계관상, 양심상 도저히 군복무를 못하겠다면 그것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게 헌법 정신과 합치된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결국 군복무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현실에서의 특정 전쟁이 불의하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것은 평화주의가 아니라 정전론의 입장이다. 김두식은 전쟁에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경로가 결과적으로 평화주의자들의 집총거부를 옹호하지 못할 것이란 점을 본능적으로 깨우치고는 과감한 오류와 비약을 무의식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평화의 얼굴에 나타난 김두식의 신학적 부박함

 

여기까지 숨가쁘게 논리적 비일관성을 관찰해왔다. 이제 그의 신학적 부박함을 살펴보자. 김두식은 예수의 말씀을 들어 정전론을 반박한다. 예수가 원수에게 대적하지 말고 오른뺨을 때린 자에게 왼뺨을 돌려 대라고 했던 산상수훈의 교훈,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 이것들만으로도 어떤 구약과 신약 선지자의 말도 무효화시키는 거친 강단을 보여주고 있다. 부분을 전체로, 전체를 부분으로 해석하는 것이 성경 해석학상의 기본 원리이다. 따라서 어떤 말씀을 어디까지 적용 시킬지는 다른 본문과의 조화 속에서 결정해야 한다. 즉 성경에 대한 조화적 관점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다.(마6:6)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의 눈이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만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기도와 같다. 둘째, 문자적으로 골방에서만, 은밀한 곳에서만 기도하라는 게 아니라 외식하는 마음가짐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니 설령 골방에서 기도한다 하더라도 마음의 중심에 뽐내고 싶고 자기 의가 가득한 것이라면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기도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떤 해석이 성경적으로 지지받을 수 있을까? 두 개는 분명 서로 충돌하는 해석이고 따라서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마태복음 11장에는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을 향한 예수의 책망이 나온다. 그러한 책망 직후 예수는 25절에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하며 하늘 아버지께 기도를 올린다. 제자들이 모두 보고 있는 곳에서 큰 소리로 기도를 올린다. 그렇게 기도 후 바로 제자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예수의 기도 공간에 제자들이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죄가 없다.(히4:15) 따라서 골방이 아닌 탁 트인 공적 공간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간주하는 첫번째 해석이 그릇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6장 6절의 골방 기도 말씀과 예수의 11장 기도, 그리고 예수는 죄가 없다는 히브리서 4장 15절의 말씀이 조화적으로 엮인다면 우리에게 적합한 해석은 두번째 것임이 분명해진다.

 

그러면 이제 김두식이 그렇게 좋아하는 산상수훈을 성경 전체와의 조화적 관점에서 해석해보기로 하자. 기독교 평화주의가 위태롭게 의지하고 있는 말씀은 마태복음 5장 39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이다. 이 말씀도 크게 두 가지의 상충적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안 된다. 조직적이고 집중된 폭력의 시현장인 전쟁은 따라서 기독교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둘째, 예수의 원수 사랑은 성경의 다른 본문들에 의해 제어되며 범위가 정해진다.

 

두번째 해석을 면밀히 고찰해보자. 예수의 원수 사랑 담론은 바울에게 계승된다. 로마서 12장 14절에서 21절에는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이 장황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럼 원수를 응징하는 응보적 정의는 어디에서 바랄까? 바울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신명기 32장 35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성도들을 위로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원수 갚음의 주체가 하나님 외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가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원수 갚음의 보응적 정의를 실현하는 대행자가 된다. 그리하여 칼을 가지고(폭력) 악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된다고 바울은 선언한다.(롬13:3) 이것은 물리적 강제력, 즉 폭력의 국가 독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사로운 보응, 사사로운 처벌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한 공적 보응, 공적 처벌의 원리를 로마서 13장에서 추출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로마서 13장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13장도 기억해야 한다. 도미티안 황제 시절 초대교회를 박해하던 로마 제국을 사도 요한은 짐승으로 묘사한다. 그 짐승은 마귀의 원형인 옛 뱀, 곧 용의 사주를 받는 사탄의 하수인이다. 로마서 13장에 암시되어 있듯이 국가 권세는 선한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을 극적으로 넘어서는 국면에서 권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역자(롬13:4)가 아니라 뱀의 시녀가 되는 것이다.

 

로마서 13장이 권세의 칼을 받아야 할 악인의 범주에 치안을 유린하는 도적 떼만을 포함시켰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로마 제국 변방에서 민가를 약탈하던 야만인들도 로마 시민을 침탈하는 악인의 축에 충분히 포함된다. 게다가 고대에는 치안과 국방의 개념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 구분은 근대의 산물이다. 실제로 로마에는 경찰이 따로 없었다. 내부든 외부든 모든 로마제국의 적은 로마군에 의해 격퇴당했다.

 

종합해보면 원수 사랑은 원수 갚음의 원천적 봉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응징의 주체가 누구냐에 종속되어 원수 갚음에 대한 도덕적 분별은 달라진다. 그 주체는 하나님이고, 또한 하나님의 대행자인 국가 권세이다. 그렇다고 응보적 정의를 행하는 모든 국가 권세의 작동과 기원이 자동적으로 선하다는 도덕적 귀결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국가의 사법권, 처벌권 독점의 원리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는 것이지, 그 외의 정부 형태나 권력 작동 방식, 국가의 기원 등 국가 권력과 관계된 제 문제를 기독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로마서 13장의 관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테마들을 로마서 13장과 연계시키는 것은 논점 일탈이다.

 

로마서 13장과 예수의 산상수훈 사이의 조화적 해석을 시행한 결과 국가의 폭력 행위가 무조건 예수의 정신, 성서의 흐름에 역행하는 죄 된 활동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루터 교회에서 산상수훈은 더는 사회적 관계,정치,경제의 영역에서 작동되는 원리가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자아 성숙을 위한 교훈으로만 받아들여졌습니다.”라며 개신교를 공격하는 김두식은 위와 같은 신학적 해석에 다음과 같이 항변할 것이다. ‘산상 수훈을 개인적 영역으로만 환원하다니! 이는 예수 복음에 대한 축소와 왜곡이다!’ 뻔히 그려지는 그림이다.

 

이런 변호론적 헛소리에 말하고 싶다.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성경 전체와의 조화적 관점을 취할 때 도달하는 결론을 어떻게 부정하라는 것이지 정말 묻고 싶다. 그 해석을 분쇄할 수 있는 성경의 내적 논리를 부디 제시해주면 감사하겠다. 덧붙여 루터교회식의 산상수훈, 즉 복음 축소 경향은 원수 사랑과 정전론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이는 복음의 축소가 아니라 복음을 사회에 적용 할 때의 올바른 현상형태를 성경에 근거하여 규정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산상수훈을 적절히 적용하는 것과 복음의 왜곡 및 축소는 다르다. 따라서 개인적 자아 성숙의 규모 정도로 복음을 묶어버렸다는 비판은 부당하다.

 

이상한 점은 산상수훈을 들어 전쟁을 반대하는 김두식이 개인의 정당방위를 옹호하는 톨스토이를 긍정적 표본으로 제시했다는 사실이다.[2] 산상수훈의 사회적 적용의 긍정과 개인적 적용의 폐지. 이 궤변. 어떠한 성경적 근거도 없이 입맛 따라 적용 범주를 전복시켜 버렸다.

 

김두식은 나아가 세례 요한의 말에 근거해 기독교 평화주의를 거부하는 해석을 비판한다. 그는 요한이 회개 하러 온 군인들에게 받은 봉급으로 족하며 살아가라고 말한 구절로부터 기독 군인의 윤리를 찾아내는 것은 “황당한 논리 전개”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뒤이어 여러 사람들이 비슷한 논리 전개 방식을 이용했다며 예수와 백부장의 구절을 소개한다. 로마 장교였던 백부장을 보고 예수가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한(마8:10)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 군대를 예수가 도덕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을 끄집어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과의 깊은 대화만으로 상대 직업을 신학적으로 승인했다는 해석은 허술하다. 하지만 백부장 일화와 세례 요한의 선포를 같은 논리 전개 방식으로 등치시키는 김두식의 “황당한 논리 전개” 는 수용할 수 없다.

 

세례 요한이 드라마틱하게 데뷔하는 컷을 들여다보자. 누가복음 3장 2절,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2절에 나와있듯이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다고 말한다. 이사야가 바라본 메시아의 때, 주의 길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영이 요한에게 부어진다. 인간일 뿐인 요한이지만, 그래서 후에 예수에게 회의 섞인 질문을 하는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마11:3), 적어도 유대 지역에 회개를 선포하는 그 시점의 요한은 정경적 예언자로서의 지위를 보유했음이 틀림 없다. 요한의 불 같은 회개의 케뤼그마가 유대 전역을 강타할 적에 세례를 받으러 온 세리와 군인들이 묻는다. 무엇을 하리이까! 이에 대해 요한은 세리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며 군인에게는 강탈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히 여기라 말한다.(눅3:12-14)

 

김두식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정당한 전쟁의 근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헤매다가 적절한 구절을 찾지 못하자 결국 세례 요한에게까지 호소하게 된 것”이라고 비웃는다. 김두식의 사고방식이 굉장히 재미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당위와 성경이 선언하는 사실을 분명히 구분”[3]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정작 김두식의 구분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적 당위와 성경이 선언하는 사실이 아니라, 예수가 직접 입에서 뱉은 말씀으로서의 당위와 성경이 선언하는 사실 사이의 그것이다. 즉 예수가 한 말씀 이외의 성경의 모든 규범적 서술은 폐지된다는 주장인 셈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당신의 말씀을 계시해 놓으셨고 그 계시의 통로 중 가장 빛나는 광채로 서 계신 분이 예수임을 믿는다. 그리고 그 예수를 대갈못으로 하는 계시의 조화와 통전성 속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나온 말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따라서 누가복음 3장 앞부분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강림과 그것을 힘입은 요한의 말씀은 성경 내에서 당위성을 획득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

 

신구약 사이의 불연속성을 가장 큰 소리로 강조하는 히브리서(구약 예식법 폐지의 교과서)마저도 전쟁에 관해서는 계시의 점진적 발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중한 긍정을 택한다. 히브리서 11장 33절에서 34절 말씀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구약에 나온 전쟁에는 인류 역사상 유일한 성전으로서의 헤렘 전쟁만 있는 게 아니다. 조카 롯을 구하러 이방 왕들과 싸웠던 아브라함,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이방 족속과 싸운 수많은 사사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성전(holy war) 아닌 전쟁도 경우에 따라서는 믿음으로 행하는 의로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게 히브리서 저자의 관점이다.

 

상당히 많은 성경의 이야기를 했지만 아직도 기독교 평화주의자들과 “해야 할 이야기는 끝도 없이 남아 있”다. 죽었다 싶으면 살아나고, 죽은 줄 알면 또 살아나는 것이 바로”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논리와 싸우다 보면 옛날에 하던 두더지 잡는 게임이 생각”난다. 두더지가 머리를 들고 올라와서 망치로 치면 저쪽에서 튀어 오르고, 또 잡으면 다른 두더지가 또 튀어 오르고······.” 왜 이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 평화주의를 고수하는 궤도 위에서 자신의 진보성을 과시하며 보수 신앙인들을 덮어놓고 바리새인과 근본주의로 몰아버림으로써 포획하게 되는 우월한 도덕적 지위. 그 달콤한 관념론적 갈망이 꺼지지 않는 한, 기독교 평화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김두식 류의 독창적이지 못한 작가들의 “노력도 계속 될 것”이다.

 



[1] 김두식, 평화의 얼굴 156p 참조

[2] 같은 책 72p

[3] 김두식,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5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