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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2년]복음전도와 사회참여 간 신앙적 중요도의 위계 및 초대교회에의 적용

 

 

목차

 

 

I.          서론

 

II.           

 

1.   신앙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들의 중요도에 대하여

 

(1) 결과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 분류

 

(2) 맥락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 분류

 

(3) 의미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 분류

 

2. 사회참여는 신앙 행위인가

 

(1) 구약의 사회참여

 

(2) 예수의 병 치유 사역과 사회참여

 

(3) 권위에 반항하기 때문에 사회참여가 부적절하다는 주장에 대해

 

3.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1) 복음전도 - 교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전도

 

(2) 복음전도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공개적 전도

 

(3) 복음전도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비공개적 전도

 

(4) 사회참여 - 교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사회참여

 

(5) 사회참여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공개적 사회참여

 

(6) 사회참여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비공개적 사회참여

 

(7) 신앙의 "소극적 유보"와 "적극적 유보"

 

4. 초대교회의 대외적 사회참여 부재가 시공을 초월해서 옳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III.        결론

  

 

I.          서론

 

그리스도인들의 여러 신앙적 행위들이 있다. 그 행위들 중 이 논문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이다. 그리고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신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간에 관계는, 특별히 그것들 간 중요도의 위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위계에 대한 분석에 기반하여 사회참여가 그것 자체로 신앙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복음전도의 수단으로서만 2차적 의미를 부여 받을 수 있는지, 또 사회참여가 설령 그 자체로서 의미부여가 가능하더라도 의미의 무게가 복음전도가 가지는 것과 동등한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신학적 물음에 답한 뒤, 초대교회의 사례에 대입하여 논리를 검토한다. 즉 신학적으로 도출된 원리가 과연 성경에서 제시되는 구체적 사례에도 충돌 없이 적용이 가능한가를 검증하는 것이다.

 

II.            

 

1.   신앙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들 간 중요도에 대하여

 

신앙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란 성경의 규범을 인지한 주체가 행하는 일을 뜻한다. 다시말해 기독인의 행위 중 신앙 안에서 승인 받을 수 있는 일련의 행위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따라서 명백한 악행들, 예컨대 도둑질, 사기, 살인 등은 기독인의 행위더라도 신앙적 행위가 아니다. 반면 기독인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식하고 그 인식이 성경의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의 행위는 신앙 행위에 포함된다. 이를테면 기독인이 수행하는 복음전도, 직장 업무, 봉사활동, 교회행정, 사회변혁적 정치활동 등이 신앙 행위라 일컬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 수많은 행위들이 모두 동등한 중요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세가지 측면에서 사유를 시도할 것이다. 첫번째 접근은 결과적 중요도에 따른 접근이다. 두번째는 맥락적 중요도의 관점에서의 접근, 마지막 세번째는 의미적 중요도에 따른 접근이다. 이러한 다층적 접근을 통해 신앙 행위 간 중요도의 위계 내지는 동등성에 대해 사려 깊은 통찰이 가능하리라 기대한다.

다만 후술할 신앙 행위들은 신앙인의 신실하고 최선을 다한 행위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불성실하고 충분한 신실함이 담보되지 않은 행위들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최선의 행위들 사이의 비교여야, 행위 간 중요도의 위계 또는 동등성을 사유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1) 결과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 분류

 

행위는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는 현실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상황마다 매우 상이하다. 그런데 결과의 상이함은 단순한 수평적 다양성이 아니라 위계를 내포한 수직적 다양성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 첫번째 사례는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두 기업가의 행위 비교이다. 기업가 A는 정당한 기업 활동으로 100억원의 이윤을 냈다. 반면 기업가 B는 50억원의 이윤을 냈다. B의 기업 활동도 정당하고 합법적이었으나 이윤 크기는 A의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 B의 기업활동 행위의 결과는 양적 측면에서 A의 행위 결과에 비해 열등하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의 우열관계를 통해 그 결과를 산출한 원인적 행위의 우열관계 또한 유추할 수 있다. 요컨대 같거나 비슷한 범주의 행위가 발생시키는 긍정적 영향의 규모와 양이 크고 많을수록 우월한 결과이고, 그 우월한 결과를 산출한 행위 역시 그렇지 못한 결과를 산출한 행위에 비해 우월하다고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결국 여기서 행위의 우월함이란 양적 결과를 더 많이 낸 것을 지칭하는 우월함이다.

두번째 사례는 수의사와 의사의 행위 간 비교이다. 수의사는 동물의 육체적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시킨다. 의사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시킨다. 그리고 한 마리의 동물을 살리는 것과 한 명의 인간을 살리는 것 사이에는 우열관계가 존재한다. 즉 죽어가는 동물 한 마리를 구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결과에 있어서 우월하다. 이 우열관계는 존재론적 위계로부터 도출된다. 동물의 존재보다 인간의 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시8:6) 그래서 비근한 예로 동물 육식은 가능하지만 식인은 윤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것을 증진시키고 긍정성을 확장시키는 결과가 우월한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우월한 결과를 생산한 행위가 그렇지 못한 행위보다 우월하다고 평가하는 게 가능하다.

복음전도의 결과가 1인의 회심이고, 사회참여의 결과가 악한 사회구조의 변혁일 때, 결과적 측면에서의 우열관계에선 복음전도가 앞선다. 회심은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1]을 받는 사건이다. 반면 사회구조의 변혁은 직접적이고 1차적으로는 영혼의 구원과 관계가 없는 세속 재산 – 여기서 재산은 단순히 부(wealth)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생명, 자유, 권리, 건강 등 오감으로 인지 가능한 경험 세계에서의 선한 자산을 총체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 의 정당하고 정의로운 보호와 확장을 일으킨다.[2] 그런데 영혼은 영원 불멸하지만 사회의 제도와 육체적 생명 및 세속의 정치경제적 권리들은 언젠가 소멸한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세속 국가와 사회 제도의 수명은 끝나게 된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에게 무료로 의술을 베풀어도, 그 사람들은 잠시간 배고픔을 면하고 건강을 되찾을지언정 육신은 결국 쇠약해지고 흙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기간”이라는 양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영혼 구원을 일으키는 복음전도가 경험 세계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참여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도 복음전도는 사회참여보다 우위에 있다. 이는 영혼이 육체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있음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다. 존재의 위계에서 영혼이 육체보다 상위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주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사용 방향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데, 하나님과 육신 간의 관계를 매개하고 육신에 규정력을 발휘하는 주체가 영혼인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선악과를 탐하자 곧 창조세계에 죄의 삯인 죽음이 침투해 들어왔고, 그 죽음에는 육신의 죽음도 포함되었다.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전도가, 감각세계의 육신에 관련된 생명, 건강, 제도, 권리를 구원하는 사회참여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있으며, 결과적 측면에서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2) 맥락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 분류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에 다 때가 있다.(전3:1) 전도서가 말하는 시의적절한 행위를 맥락에 적합한 신앙 행위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맥락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란 구체적 맥락과 상황에서 시급하게 해야 할 신앙 행위가, 당장의 시간적 급박함이 없는 다른 신앙 행위들에 비해 중요성이 큼을 뜻한다. 응급환자의 사례를 살펴보자.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에게 약을 투여하고 소생술을 실시하는 대신 복음을 전하는 게 적절한가? 이 응급환자의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의료행위이다. 비록 의료행위의 결과인 육체의 소생이 영혼의 구원보다는 결과적 측면에서 중요도가 떨어지더라도, 위 사례의 맥락상 가장 절실하고 시급하며 중요한 행위는 복음전도가 아닌 의료행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때로 맥락은 전환될 수 있다. 예배 중에 사람이 쓰러지는 경우가 맥락 전환의 예이다. 애초에는 예배의 맥락이었다. 예배의 맥락에서 예식과 관련이 없는 행위는 비맥락적이고 중요도가 떨어지는 행위이다. 그러나 갑자기 생명이 위급한 응급 환자가 예배를 드리는 도중 발생한다면, 종교 예식보다 긍휼을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마9:13)에 근거하여 예배를 잠시 중단하고 빨리 환자를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이 때 예배의 상황에서 응급환자 이송의 상황으로 맥락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러한 맥락의 중요도에 따르자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간에 신앙적 위계는 맥락과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복음전도가 맥락적 중요도에 있어서 사회참여보다 우위에 있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그 반대의 위계가 형성된다. 복음전도를 위한 해외선교나 국내 단기 선교를 준비하는 팀에게는 복음전도가 맥락상 최우선 순위가 되며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반면 국가권력 및 자본권력의 전횡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기독 시민 운동가의 공적 삶의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갖는 것은 사회참여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맥락에 따라 전도와 전도 이외의 활동을 성실히 수행하셨다. 갈릴리에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명제적 선포를 하셨다. 복음을 언어로 전하는 전도의 행위에 최선을 다하신 것이다. 반면 별다른 복음 전도의 수반 없이 행해지는 치유사역의 사례도 성경에서 여럿 보인다.

요한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 옆의 38년 된 병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 병자에게 예수는 “낫고자 하느냐”는 물음을 던진다. 그 병자는 정작 낫고 싶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지금껏 자신을 물에 사람들이 넣어주지 않아 이 신세로 있노라고 원망과 한이 서린 목소리를 전한다. 이에 예수는 그 원망과 불평의 기표 아래에 숨어있는 치유를 향한 갈망의 기의를 읽어내고는 말씀의 권능으로 치유해준다. 그런 치유사역 이후에 예수는 홀연 사라진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그 병자의 병을 고쳐주면서 복음의 명시적 제시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 병자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낫게 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말이며, 후에 예수가 병자를 다시 만나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에서 볼 때, 그 병자는 영혼 구원 이전에 육체적 병의 치유를 먼저 맛본 것이다.

마가복음 6장 53-56절에서는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게네사렛 사람들의 병은 치유함을 받았다. 역시 복음의 명시적 선포는 없었다.

요한복음 9장을 보자. 거기서 예수는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발라 고치신다. 그 맹인에게 예수는 즉시 복음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맹인을 눈 뜨게 해주신 후 몸을 피하셨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던 끝에 치유 받은 맹인이 출교를 당한다. 공동체로부터의 완전한 소외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소외된 자를 예수가 다시 찾아간다. 공동체로부터 거세되는 심리적,사회적 고통에 반응하는 예수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예수가 맹인을 만나서 하는 말, “인자를 믿느냐.” 이 말인즉 메시아를 믿느냐는 소리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온 사람의 아들 같은 형상을 가리키는 ‘그 사람의 아들’, ‘인자’는 곧 신의 자식이자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메시아를 뜻하고, 그 뜻하는 바를 아는 맹인이기에 ‘그 인자’를 믿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로서의 존재를 드러내자 맹인은 엎드려 절하며 신앙고백을 한다. 이 때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복음전도와 그것으로 인한 영혼구원의 때이다.

성경에 나온 위의 세가지 사례(베데스다 연못 옆 병자, 게네사렛 치유 사역, 요한복음 9장의 맹인)를 살펴보면, 예수가 복음전도 이외의 맥락에서는 복음전도가 아닌 사역일지라도 그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 행위로 설정하고 행동하셨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치유 사역이 궁극적으로 영혼 구원과 연관되는 전도의 맥락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적절치 못한 지적이다. 게네사렛에서 예수의 옷가에 손만 대도 치유를 입었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께 신앙고백을 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적어도 게네사렛 치유 사역은 복음 전도를 계산적으로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당장의 병고침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절박함에 반응했던 오롯한 치유사역의 맥락이었다. 요한복음 6장과 9장에서 예수가 치유사역 후 시간이 흘러 복음을 전한 것은 - 게네사렛의 사례를 상기해 볼 때 - 치유사역이 복음전도사역에 종속되었던 것이라기보다는 치유사역에서 복음전도사역으로 맥락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게 더 적절하다. 또한 후술하겠지만 복음전도와의 접속 없이도 치유 사역 자체로 충만한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기에, 치유 사역이 독자적 맥락의 것이라고 이야기하기에 신학적 무리가 없다.

앞서의 치유사역 사례로부터 사회참여에 적용할 맥락적 중요도를 추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치유사역과 사회참여 모두 복음전도 이외의 신앙행위이며, 동시에 치유사역과 마찬가지로 사회참여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거룩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치유사역의 맥락에서는 복음전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어도 그 사역에 최우선의 중요도를 부과했던 것처럼, 사회참여가 필요한 맥락에서는 기독인의 행위가 설령 복음전도와의 연관성을 세밀하게 계산하지 못하더라도 사회참여사역 자체에 집중하고 가장 높은 우선순위와 맥락적 중요도를 부여하는 것이 신앙적 인준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찬가지 논리로 복음전도가 절실한 선교의 맥락에서는 사회참여와의 직접적 관련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복음전도에만 매진하고 최고의 중요도를 지닌 신앙행위로 여기는 것이 이상할 게 없다. 결국 맥락적 중요도를 고려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의 위계는 맥락에 따라 가변적이다.

 

(3) 의미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 분류

 

여기서 신앙적 의미란 신앙 행위의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이다. 상이한 신앙 행위들 간에 신앙적 의미는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신앙 행동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똑같은 인정을 해주시진 않는다. 전자의 신앙인에게 더 큰 인정과 상급이 부여된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반면에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했더라도, 각 신앙 행위의 과정이 신실함과 최선의 믿음으로 구성되었다면 그 신앙 행위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은 동등할 것이고 따라서 신앙적 의미 또한 무차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II-1에서 신앙 행위를 “신앙인의 신실하고 최선을 다한 행위”라고 정의하였다. 그렇다면 (신실하게 최선을 다한) 신앙 행위들 간에 의미적 중요도는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 상이한 결과를 가져오는 신앙 행위들이 담지한 신앙적 의미의 대등성을 살펴보자. 달란트를 종들에게 각자의 재능대로 맡긴 “어떤 사람(주인)”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인물이다. 두 달란트를 받은 자는 두 달란트를 남겼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상이한 두 결과에 대한 주인의 반응은 동일하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23)”, 이것이 주인의 반응이고 각 종들이 행한 행위에 대한 인정이었다. 주인을 하나님으로 놓고 본다면 하나님의 반응, 하나님의 인정하심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사이에서 무차별하다. 신앙 행위의 결과적 상이함이 신앙적 의미의 상이함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신앙 행위의 과정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신앙 행위의 결과가 두 달란트이든 다섯 달란트이든 상관 없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동등한 인정과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신다.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도 신앙적 의미가 부여되는 원리를 보여준다.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이 성전 재정에 기여한 결과는 보잘것 없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소유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과부의 신실한 신앙고백의 중심을 보시고는 극찬을 하셨다. 이는 과부의 신앙 행위의 “과정”에서 드러난 최선의 신실함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었지, 헌금 행위의 “결과”에 대한 인정은 아니었다. 만약 과부보다 부유한 사람이 자기 소유의 전부를 내놓음으로써 철저한 신앙 고백을 담은 신앙 행위를 하였더라도,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은 과부와 동일했을 것이다. 과부와 부자가 낸 헌금의 양과 그것이 성전 재정에 보탬이 되는 현실적 결과는 다를지라도 각자의 신앙 행위의 과정에서 보여진 신실한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인정으로 말미암아 동등한 신앙적 의미의 무게를 갖게 된다.

위 논의의 맥락에서 볼 때,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간에 신앙적 의미의 중요도에 따른 수직적 위계는 적어도 추상적 수준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구체적 상황에서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에 신앙적 의미의 중요도로부터 결정되는 수직적 위계가 발생할 수 있다. 다만 그 위계는 유동적이다. 이를테면 신실한 믿음의 과정을 통해 수행한 복음전도가 자기 의에 빠져 행한 사회참여보다 훨씬 신앙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요나처럼 하기 싫은 가운데 억지로 복음을 전한 행위와 이사야처럼 열정을 다해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회참여의 행위 중에는 후자의 신앙적 의미의 무게가 더 무겁고 값질 것이다.

그런데 추상적 수준에서의 신앙 행위, 즉 전술한 “신앙인의 신실하고 최선을 다한 행위”의 관점에서 보자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모두 신앙 행위의 범주에 포괄되고 따라서 둘 사이에 신앙적 의미의 중요도에 따른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모두 복음의 씨앗에서 피어나온 아름다운 두 개의 꽃인 것이다.

 

2.   사회참여는 신앙 행위인가

 

신앙 행위가 되려면 성경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참여가 성경의 규범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온전한 통로가 될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따져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사회참여의 성경적 근거를 헤아리기 전에 사회참여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논의에서 사회참여란 사회구조에 대한 기독교적 사유와, 그러한 사유에 착근되어 사회구조를 변혁 또는 유지하는 활동에 한정된 개념이다. 즉 사회봉사와 같이 제도나 문화의 구조적 문제를 우회하는 선한 행위들은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봉사는 교회 내에서 별다른 이견이 없는 반면에, 구조를 뜯어 고치는 사회 참여의 급진성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라는 것을 교회 바깥의 세상을 뜻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사람들이 모여있는 교회도 하나의 사회라고 할 수 있고, 교회의 관계망 및 구조를 바꾸는 행위도 변혁적인 사회참여의 범주에 포괄된다.  

 

(1) 구약의 사회참여[3]

 

구약에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회 구조의 원형들이 잠재되어 있다. 또한 그러한 원형에서 이탈하여 불의한 제도가 형성되었을 시에는 선지자들의 활발한 체제 비판이 이루어졌다. 기독교의 사회참여는 체제 및 구조에 대한 기독교적 고민과, 그 고민을 기반으로 하여 수행되는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 행위들이다. 그렇다면 사회를 사유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구약의 정치경제적 제도의 예시들과, 선지자들의 비판행위들을 사회참여의 구약적 사례들로 간주하는 게 가능하다.

먼저 구약에 계시된 사회 구조의 원형적 원리들을 살펴보자. 잠언 31장 8-9절에는 왕이 해야 할 역할이 나온다. 

 

너는 말 못 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왕은 사회의 언저리에 있는 자들을 일차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시편10편,146편) 가난이 실질적 자유를 파괴하는 주된 요인임을 상기할 때, 왕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희년과 안식년으로 대표되는 경제 정의를 세우고 실질적 자유를 증진시킬 중요한 임무가 있었던 것이다. 구약은 부의 분배 형태에 대해서도 강조하여 언급한다. 생산 수단(토지)을 주기적으로 회복시켜주는 희년은 한 가정이 “난처한 정도의 최소한이 아닌 이성적이고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겨지는 만큼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기”[4]를 바란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경제 제도였다. 모든 가족에게 동일한 수입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족 별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최소한의 의식주 욕구를 충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동체에서 존중 받는 참여자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자원을 소유하는 경제적 기회의 평등을 누리길 뜻하신 것이다. 따라서 소득의 분배 구조는 최고위층의 부와 특권이 아닌 최하위 계층들의 사회적 안녕과 경제적 생존이라는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했다. 

안식년과 이삭줍기에 대한 법의 취지도 소유권보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의무가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시장에서 이루어진 채권-채무관계도 안식년에는 청산되어야 했다.(신15:1-18) 채무자를 종으로 만들거나 그의 가진 재산을 남김없이 압류함으로써가 아니라, 빚 때문에 종 된 자를 풀어주고, 부채를 탕감해줌으로써 채무자로서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이삭줍기는 동냥과는 거리가 멀었다. 룻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이삭 줍는 사람들이 떨어뜨린 낟알을 모았기 때문이다.(룻2장) 그녀는 곡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다. 토지 소유자들은 밭에 있는 것을 모조리 추수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얼마간의 곡식을 남겨두어야 했다.

이렇듯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켜나가는 긴요한 통로가 되어야 할 사회 제도가 뒤틀리고 약자를 압제하는 불의의 망치가 될 경우에는 선지자들의 비판적 활동이 그에 비례하여 활발해졌다. 아모스는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암2:6,7)는 사회적 악을 지적한다. 이사야는 희년의 정신을 내팽개치고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사5:8) 악한 토지 축적자들을 향해 죽비 같은 일갈을 날린다. 에스겔서에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않”(겔16:49)은 소돔의 사회경제적 죄악을 반복하던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말씀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미가서에는 남의 산업을 강탈하는 권세가들의 횡포에 대한 비판이 기록되어 있다.(미2:2) 시편에는 부패한 왕권과 불의한 법으로 인해 백성들이 당하는 불행을 호소하며 구조적 악을 고발한다.(시94:20) 사회 구조 자체의 불의함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10:1-2)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예언자의 사회비판적 전통과 의로운 사회 제도의 원형들이 살아 숨쉬는 구약에는 열방의 사회구조적 타락을 향해 소리치셨던 하나님의 절규가 갈피갈피를 수놓고 있다. 그리고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안타까운 외침은 현 시대와 사회를 향해 거룩한 충돌을 감수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무한한 신앙적 의미의 인준이자 응원이다.

 

(2) 예수의 병 치유 사역과 사회참여

 

예수의 병 치유 사역에서도 사회참여의 원리를 추출하는 게 가능하다. 육체적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은 최초의 인류가 하나님을 반역하여 죄를 짓고, 그 죄의 삯인 죽음이 창조세계에 침투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즉 질병은 죽음의 증상인 것이다. 따라서 질병을 개별 자범죄에 일일이 관련짓는 것은 부적절하지만(요9:2,3), 질병이 인류 전체의 원죄와 명백한 신학적 연관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예수의 치유 사역은 죄와 죽음으로 인해 어그러진 창조세계를 회복하는 거대한 구속 사역의 한 부분이었다. 비록 육신의 소생 및 회복이 영적인 구원은 아니지만, 그것이 영육간의 창조세계 전체를 회복시키는 샬롬의 기획 안에 분명히 포괄되는 하나님의 사역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사회참여가 가지고 있는 사회변혁적 요소는 죄와 죽음의 사회 구조를 좀 더 정의로운 것으로 바꾸려는 열망의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참여도 죄로 뒤틀린 창조세계의 일부분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샬롬적 기획에 잇닿아 있는 치유 사역이다. 병 치유사역이 육신의 질병을 회복시키고 그럼으로써 죄가 몰고오는 생물학적 죽음의 증상과 싸우는 것이라면, 사회참여 사역은 사회의 질병을 고치고 죄와 죽음의 체제를 타파하는 회복의 사역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전도와 당장의 직접적 관련은 없었던 예수의 치유사역(막6:53-56;요5장,9장)으로부터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지지할 수 있는 든든한 신앙적 당위를 얻게 된다.

 

(3) 권위에 반항하기 때문에 사회참여가 부적절하다는 주장에 대해

 

사회봉사와 달리 사회참여는 기존의 권세, 권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권력과의 싸움 때문에 사회참여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교회내의 분위기가 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정서적 반응이다. 하지만 성경적 반응은 아니다. 성경은 세상의 권위, 권세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는 국가 권세에 복종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권세에의 복종이 곧 하나님께의 복종이라는 준엄한 선언이 담겨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세를 거스르는 세상 권세에까지 따를 이유는 없다. 사도행전 5장에서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에게 말씀 선포를 금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이스라엘의 최고 재판기구로서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던 공적인 권세였다. 그러한 권세의 명령에 대해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하며 불복종했다. 하나님의 권세보다 공회의 권세가 클 수 없다.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권세에 관한 중요한 원리는, 항상 "더 큰" 권세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하위 권세가 상위 권세를 거스른다면, 그 하위 권세의 명령이 아닌 상위 권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따라서 세상의 권세가 상위 권세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맥락에 위치한다면, 그것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변혁적 사회참여가 신앙인의 의무가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노무현 정권 시절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교계의 목회자들이 집회와 시위에 참가해 행정부의 권력, 권위에 저항했던 것이다. 주류 교계가 보기에 사학법 개정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권세를 거스르는 악한 권세의 시도였고, 그렇기 때문에 비록 국가의 권세일지언정 복종의 대상이 아닌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3.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앞의 논의에서는 사회참여도 성경의 지지를 받는 엄연한 신앙 행위이고, 따라서 의미의 중요도에 있어서 복음전도와 대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사역에는 당시의 정치,사회 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공식적이고 활발한 사회참여가 빠져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의 표를 그렸다. 아래 표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가 작동하는 영역을 섬세하게 구분하고 있다.

 

<표1>

 

복음전도

(1)교회내부

일반적인 설교, 성경 공부

교회외부

(2)공개적 활동

불신자 대상으로 하는 전도 축제

(3)비공개적 활동

북한, 중국, 이슬람 문화권 등 기독교에 호전적으로 반응하는 국가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전도 활동

사회참여

(4)교회내부

오네시모 사례(빌레몬서),히브리파 과부들을 위한 교회 구조 변혁(행6:1-6), 바울의 pax romana 및 세상 권세를 향한 비판, 요한계시록13장에서 짐승으로 묘사된 국가 권세

교회외부

(5)공개적 활동

집회 및 시위에 나가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교회, 기독교 시민 단체 결성, 기독교 통일 운동, 기독교의 혼전순결 및 금주 운동

(6)비공개적 활동

본 회퍼의 히틀러 암살 시도

 

<표1>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겠다.

 

 

(1) 복음전도 - 교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전도

 

넓은 의미의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신자에게 선포하는 명제적 복음뿐 아니라, 신자들에게 복음을 심화되고 다양한 형태로 전하는 것도 복음전도[5]이다. 이런 의미에서 매 주일에 행해지는 설교도, 그것이 정상적인 설교라면 복음의 내용을 설파하는 것이기에 전도행위이다. 다만 교회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전도행위라는 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음전도라고 생각했던 불신자 전도와 다른 점이다. 또한 교회에서 소그룹으로 이루어지는 성경공부도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기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 행위에 속한다.

이러한 교회 내부의 전도 활동은 초대교회에서도 당연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사도들이 쓴 편지들이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고, 그것이 겨냥한 대상이 당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신약성서 전체를 교회 내부에서 이뤄진 복음전도의 집적물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다.

 

(2) 복음전도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공개적 전도

 

교회의 공식적인 이름을 걸어놓고 하는 전도 축제가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공개적 전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교인들이 지하철 역 주변이나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커피를 나눠주면서 전도 팜플렛을 배포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개적인 전도활동은 신약성서에서도 풍부하게 관찰된다.(행3:11-4:22;6:8-7:60;9:27-29;17:16-34 등)

 

(3) 복음전도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비공개적 전도

 

기독교에 매우 호전적으로 반응하는 문화권에서 전도를 수행해야 할 때, 비공개적이고 비밀스러운 복음전도의 양태가 나타난다. 여기서 호전적 반응이란 단순히 몇몇 복음전도자가 박해를 받고 큰 손해를 입는 정도[6]의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하는 게 발각될 시, 교회 전체가 국가 권력에 의해 절멸될 것이 합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상황을 뜻한다. 이 때는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비밀리에 개별적으로 불신자들을 접촉하고 지하교회나 가정교회로 새신자들을 맞이하는 방식으로 전도가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사례는 현재 북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선교이다. 북한 정권은 어용 교회가 아닌 복음적 교회에 매우 적대적이다. 그래서 북한에서의 선교는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다. 교회가 빛으로 나와 공개적인 전도 활동을 수행할 시 북한 교회 전체가 잔인한 탄압에 직면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이러한 무차별적인 핍박의 환경에서는 피하고 숨어서 비공개적으로 진행되는 복음전도를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박해가 진행될 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하라고 말씀하셨다.(마10:22,23) 그러므로 국가 권세가 교회를 대적하는 가증한 짐승(계13장)의 형상으로 화할 시 박해를 피해 비공개적인 전도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성경적 신앙에 저촉되지 않는다.

덧붙여 신약성서에 이러한 형태의 비밀스러운 전도가 흔하게 관찰되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 초기에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의 본질[7]을 간파하지 못한 채 정의의 법으로 기독교의 보호자가 되었고, 심지어 바울을 수 차례 위기의 순간에서 구출까지 해주었기 때문이다.[8] 즉 초대교회가 초기에 대면했던 로마는 간헐적으로 기독교회와 충돌을 일으키긴 했지만 아직 적그리스도적 권세가 되기 이전의 상태였다.

 

(4)사회참여 - 교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사회참여

 

사회참여는 반드시 사회구조의 변혁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건전한 사회제도가 있다면 그것을 보수하기 위한 참여와 활동도 기독교적 사회참여이다. 그러나 지금 살펴볼 부분에서는 변혁적 활동으로서의 사회참여만을 염두에 둘 것이다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닌 형제로 대우하라는 내용의 서신서가 빌레몬서이다.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도 그리스도인이고, 바울의 전도를 받고 회심한 오네시모도 그리스도인이다. 이들 세 사람이 로마제국의 노예제도 자체를 타파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교회 내부[9]의 노예-주인의 비인간적인 구조는 복음의 능력으로 혁파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내부에서 이루어진 구조 변혁적인 사회참여의 사례로, 오네시모를 형제로 대우하게 된 빌레몬서의 사건을 들 수 있다.

교회 내부에서 이루어진 구조 변혁의 사례는 또 있다. 사도행전 6장에는 구제 혜택에서 차별을 당한 히브리파 과부들의 원망이 나온다. 이에 사도들은 구제사역과 말씀사역을 이원화하는 교회 구조 변혁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직분이 집사이다. 구제 혜택 분배의 공정성을 위해 시도한 구조 변혁은, 앞서 “사회”를 “사람들의 모임”으로 넓게 정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한 사회참여의 사례이다. 그리고 이 사회참여의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 무리도 복음에 순복하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였다.(행6:7)

이러한 실질적 구조 변혁만이 교회 내부의 사회참여가 아니다. 사회참여적 설교나 서신서의 내용 또한 교회 내부에서 행해지는 사회참여이다.[10] 사회 변혁의 활동에는 비언어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고취시키거나 사회 구조에 대한 기독교적 통찰을 열어주는 언어적 선포 행위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세상 권세의 막후에 자리잡은 사악한 구조의 역학관계를 설명한다.(엡6:12)또한 골로새서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께 반역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의 악한 구조를 근원적으로 무력화시킨 일로 소개하고 있다.(골2:15) 나아가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3에서 “평안하다, 안전하다”라는 사람들의 말을 비판하며 로마 제국 이데올로기의 중심 슬로건이었던 ‘팍스 에트 세쿠리타스’(평화와 안전) 또는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한 평화)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것은 주석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일치된 견해이다.”[11]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불의한 국가 권세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은 로마서 13장과 함께 국가 권세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에 균형을 맞춰주는 성경 본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실현하는 선한 도구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죄에 물들어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탄의 하수인일 수도 있는 국가 권세의 야누스적 특성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제공해주는 본문들이다.

 

(5) 사회참여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공개적 사회참여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공개적인 사회참여의 예로는 민주국가에서 교회가 집회 및 시위에 나가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것, 기독교 시민 단체 결성, 기독교 통일 운동, 기독교의 혼전순결 및 금주 운동 등이 있다. 초대교회가 발생하기 이전에 예수의 사역에서 드러나는 가이사와 헤롯의 통치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종교 권력자인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하였던 일들이 공개적 사회참여의 범주에 포괄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공개적 사회참여의 예시를 초대교회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혹자는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서의 소동이 초대교회의 사회참여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적절한 예가 아니다. 당시 에베소에서 바울의 복음전도를 받고 회심한 사람들이 여신 숭배를 하지 않게 되자 아데미 여신상을 만들어 판매하는 벌이가 쇠퇴하게 되었다. 이로써 에베소의 산업구조에 변화가 왔다. 분명한 구조적 변화이지만 당시 바울을 필두로 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에베소의 산업구조를 바꾸기 위한 의식적인 활동 및 운동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우상숭배를 멀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인 와중에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상 제조 산업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 뿐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이고 역사이지만, 우리가 찾는 교회 외부의 공개적 사회참여에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째서 초대교회에서는 공개적인 사회참여가 거의 전무했을까. 그 이유는 구조 변혁적인 사회참여가 로마 제국에서 갖는 함의가 로마 제국을 향한 전복적 시도이고, 따라서 그러한 적극적 전복의 시도가 – 비폭력적인 것일지라도 - 감지되는 순간 초대교회는 로마의 극렬한 탄압을 받아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태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 숭배의 허위의식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로마 제국이 제국의 정치경제적 질서를 변혁하려는 약간의 사회적 움직임에 반역의 주홍글씨를 찍고 처절한 물리적 응징을 가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로마 제국의 상황은 현재의 북한, 중국과 비슷하다. 공산당과 각을 세우는 사회변혁적 활동에는 고강도의 정치적 탄압이 수반된다. 그래서 중국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목적 없이 오직 기도 같은 종교적인 신앙 활동에 전념할 뿐이라며 정부 당국에 피력하고 있다.[12]

 

(6) 사회참여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비공개적 사회참여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비밀스러운 사회참여의 예로는 본 회퍼의 히틀러 암살 시도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비밀 결사대의 형식으로 폭력적 변혁과 전복을 꿈꾸는 것이 과연 교회의 사회참여 방식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크다.

정상적인 현대의 민주국가라면 굳이 비공개적 사회참여가 필요하지 않다.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얼마든지 사회참여, 정치참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비민주적인 국가에서 거시적인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변혁하는 사회참여를 한다면 정치적 탄압을 피해 비밀리에 수행해야 하는데, 사회참여의 성격상 정부의 감시를 피한 비밀스러운 활동 자체가 복음전도와는 달리 물리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다. 비밀리에 사회참여를 준비하다가, 사회의 제도를 바꾸자고 목소리를 내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공적인 목소리이고 공개적인 광장으로 나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초대교회에서는 공개적 사회참여와 마찬가지로 비공개적 사회참여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7) 신앙의 “소극적 유보”와 “적극적 유보”

 

박해와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렇다면 교회 외부의 상황이 사회참여에 매우 적대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잠시 접어 두는 게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앞서 교회 외부에서 진행되는 비공개적인 복음전도를 옹호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박해가 진행될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한 피신이 정당하다고 말씀하셨음을 살펴보았다.(마10:22,23) 박해로부터의 피신이라는 신학적 테마는 기독교를 적대하는 문화권에서 진행되는 복음전도의 형태가 비공개적인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지지하고 있다. 즉 교회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박해를 일부러 유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앙의 소극적 유보”라고 지칭하겠다. 이러한 소극적 유보는 교회의 생존을 위해 선행을 잠시 유보하는 것이다.

신앙의 소극적 유보는 복음전도뿐 아니라 기타의 여러 신앙 행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신앙의 유보는 신앙 행위의 유보를 부분집합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생존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비우호적이고 반기독교적인 문화권에서는 잠시간 교회 외부의 공개적 사회참여 활동을 유보하고, 초대교회처럼 교회 내부의 사회참여 활동에 매진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타당하다.

소극적 유보”의 대조적 개념으로서 악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신앙의 적극적 유보”도 있다. 이를테면 로마의 권세에 굴복하여 황제숭배, 곧 우상숭배를 하는 것은 “신앙의 적극적 유보”이다. 이러한 “적극적 유보”는 교회가 타협 가능한 임계치를 넘어선 명백한 배교이다. 이 때에는 교회 전체가 순교와 절멸을 각오한 대결을 벌여야 한다. 도미티아누스(주후81-96년 재위)치하에서의 황제숭배 위협에 대해 요한계시록은 적그리스도적 국가 권세에 대항하여 죽기까지 신앙을 지키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것을 선포하고 있다.(계13장;17-18장) 황제숭배라는 신앙의 “적극적 유보”를 강요하는 악한 국가 권세에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저항해야 한다는 게 성경의 메시지인 것이다.

 

4.  초대교회의 대외적 사회참여 부재가 시공을 초월해서 옳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신약성서에 기록된 사회참여가 교회 내부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의 민주국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대외적 사회참여를 삼가고 대내적 사회참여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껏 한국 교회가 통일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봉사 및 참여의 활동을 해온 것[13]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할 것인지 궁금하다. 통일은 거대한 두 정치 집단이 하나의 체제로 일원화되는 엄청난 구조적 변혁이다. 그리고 명백히 교회 바깥에서 진행되는 국가적 사역이다. 신약성서에서 명시적으로 포착되는 대내적 사회참여만이 성경적이라는 논리에는 교회의 통일 운동을 신학적으로 지지할 근거가 없다.

또 이들 주장처럼 신약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반성경적이라면,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학교, 혼전순결 운동, 금주 금연 운동, 해외<단기>선교, 수련회, 전도 축제, 새신자 환영 레크레이션, 전자기타와 드럼을 이용한 찬양 사역 등 현대 교회의 수많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활동들이 순식간에 부정된다. 이것이 얼마나 부적절한 주장인지는 이렇듯 금세 드러난다.

그들이 하늘과 땅을 뒤섞듯이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내용과 형식 사이의 구별이다. 복음의 내용이 있고, 그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은 상황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다. 아무쪼록 몇이라도 구원하고자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고전 9:22)을 고백한 바울의 신앙으로부터 복음의 몸통을 바꾸지 않은 채 의복을 갈아입는 성경적 지혜를 배울 수 있다.

대외적 사회참여와 대내적 사회참여는 사회참여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시대의 “형식”이다. 왜냐하면 전술했던 구약 선지자들의 구체적이고 맹렬한 사회참여가 분명 대외적 사회참여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구약 선지자들의 사회참여 형식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앞서 논의했듯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복음전도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도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신양성서에는 없었던 신학교, 해외<단기>선교, 수련회, 전도 축제, 새신자 환영 레크레이션, 전자기타와 드럼을 이용한 찬양 사역이 복음의 “내용”을 담은 시대적 “형식”으로서 교회의 적절한 활동이 되는 것이다.

 

III.        결론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모두 복음의 씨앗에서 뻗어 나온 신앙 행위이다. 결과적 중요도에 따른 위계질서에서는 복음전도가 사회참여보다 우위이지만, 맥락적 중요도를 기준으로 짜여진 위계는 유동적임을 살펴보았다. 더 나아가 의미적 중요도로부터 도출된 위계에 주목해 볼 때,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사이에 수평적인 대등성의 관계가 존재함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사회참여는 그것이 복음전도의 수단이 아닐지라도, 그 자체로 신앙적 의미를 획득하는 독립적인 신앙 행위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혹자는 가장 좋은 결과를 내는 복음전도에 신앙 활동 시간 중 가장 큰 가중치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제언은 각자의 사명을 따르자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직분이 다르고 그리스도인의 개별적 사명이 다르다.(고전12:8-10;28-30) 따라서 누군가는 복음전도에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는 복음전도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사회참여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인지한 후 신앙 행위의 상당 부분을 복음전도보다 사회참여에 할애한다. 중요한 것은 직분이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이 같음(고전12:4-6)을 믿고 상대방의 직분과 소명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모두의 신앙 행위는 의미적 중요도에서 대등하기에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로의 사명을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이 구원받는 지상 최고의 결과를 기대하되, 복음전도 이외의 신앙 행위들이 영혼 구원과 어떤 연관을 가질지는 너무 염려하지 말자. 이와 관련해 C.S. 루이스가 인상적인 통찰을 준다. 그의 저서 <영광의 무게> 일부를 인용하겠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진리와 미에 대한 욕구가 존재하고, 하나님이 어떤 욕구를 만드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미를 그 자체로 추구하면서도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뵈옵는 쪽으로 전진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간접적으로 돕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지식이나 미에 집중하되 그것들이 하나님을 뵈옵는 일과 궁극적인 연관성이 있는지 너무 염려하지 않는 것이 욕구에 충실한 일이자 겸손한 처사일 것입니다. 즉, 우리는 당장 보이는 게 없어도 우리 소명에 겸손하게 순종해서 연구를 계속할 따름이고 이후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그 영적 의의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루이스는 미와 지식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사회참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회참여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영혼 구원과 연관되는지를 우리가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우리의 소명에, 우리 이웃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예수의 심정으로 치유와 회복, 변혁의 길에 올라서서 깊이 패인 집단적, 사회적 상처에 긍휼을 부어 넣으면 된다. 훗날 그것들을 영혼 구원의 재료로 쓰실지의 여부는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이다. 우리는 겸손히 물주고 씨를 뿌리면 된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1] 구원에는 과거적, 현재적, 미래적 차원이 있다. 위 논의에서 초점이 되는 구원은 과거적 측면의 구원이다.

[2] 물론 영혼의 구원이 삶 전체에서 행위의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기독교적 사회 참여와 변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반대로 사회참여를 통한 사회 변혁이 복음 전도에 유리한 사회환경을 조성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러한 파급적 결과들은 논리적으로 확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는 불확정적인 것들이기에 잠시 제쳐두기로 한다.

[3] 여기서 세번째와 네번째 단락은 필자의 다른 글에서 인용했다

[4] 로날드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IVP,2008) P.126.

[5] 앞서 언급했듯이 사회참여도 복음으로부터 도출되는 복음적,신앙적 활동이다. 따라서 사회참여에 대해 설교하는 것도 복음전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논의의 편의를 위해, 여기서의 복음전도는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이야기하는 전도는 제외한 전도로 한정짓는다.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설파하는 복음전도는 후술할 (4)의 교회내부의 사회참여 사례에서 다룬다.

[6] 스데반의 순교(행7:54-60), 박해당한 사도들(행5:17,18)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7]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등 로마 제국의 허위의식에 저항하는 특성

[8] 필립샤프, 교회사전집 –사도적 기독교(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4) P.305

[9]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다.(고전1:2) 따라서 오네시모,빌레몬,바울 사이에서 이루어진 노예-주인 관계의 분쇄는 교회 내부에서 진행된 노예제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10]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복음에 근거한 사회참여적 설교도 복음전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인 사회참여를 설교하는 것도 전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앞서 복음전도는 사회참여 이외의 복음적 내용을 전하는 것으로 한정하였다.

[11] 김세윤, 그리스도와 가이사, (두란노 아카데미,2009) P.35

[12] <‘지상에서 부활’ 꿈꾸는 중국 기독교>, <<시사저널>> ,( 2012. 8. 8.).

[13] 성서한국은 통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기독교 단체 중 하나이다. 참고 : <성서한국 “통일 비전 제시”> <<국민일보>> ,(2007.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