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4년 이전 에세이

[2012년]칼빈주의와 사회참여

 

 

 

 

웅장한 칼빈주의 체계를 아틀라스처럼 떠받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명한 이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신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외치지 않으신 영역은 단 한 평도 없다.”[1]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온 우주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 주권의 편만함(시33:6-15;24:1)을 신뢰함으로써, 칼빈주의는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위한 든든한 신앙적 인준과 응원을 얻습니다. 강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칼빈 신학 내에서의 신앙이란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공적 영역”에까지 뻗어있기 때문입니다. 즉 칼빈주의가 지향하는 신앙적 관심의 범위는 하나님 주권의 광활함과 포개지는 것입니다.

 

신실한 칼빈주의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화란에서 수행했던 사회참여의 역사적 선례는 “기독교적 사회참여=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단순하고 즉자적인 도식이 얼마나 부박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기존 교회 문화에서 사회참여를 곧바로 자유주의 신학과 연결짓는 신앙 인식 구조를 찾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이는 사회참여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강화하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의 통로를 부당하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한국 교회 성도들이 건전하고 적절한 신앙적 관심을 사회참여에 기울이기가 힘듭니다. 적어도 장로교의 교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라면, 협애한 신앙관을 지양하고 칼빈주의가 가리키는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며 사회참여를 신앙적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노력과 연습을 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의 이같은 신앙적 분투를 지원하고 도와야 할 거룩한 책무가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칼빈 신학의 탁월성은 세속 이데올로기에 대처하는 카이퍼의 자세에서도 드러납니다. 강연을 인용하면, “카이퍼는 당시 네덜란드에도 확산되고 있었던 급진적이고 유신론을 떠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했고, “더불어 기득권 층의 보수주의에도 반대했으며, 자유주의에도 맞서서 투쟁”하였습니다. 이것은 리처드 니버가 유형화한 “문화 변혁자” 모델에 속하는 칼빈주의의 자연스러운 신학적 귀결입니다. 강연에서 지적하였듯이 “역사와 삶에 들어가서 그것을 성경의 정신으로 개혁하는 것이 칼빈 신학의 특징”인데, 이는 영과 육의 모든 창조세계에 끼치는 하나님의 주권이 죄와 싸우는 거룩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속의 이데올로기로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독특한 생각의 좌표를 역사의 공간에 찍어 넣고는, 거기로부터 변혁의 에너지를 무한하게 방출하는 신학이 칼빈주의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참여시 기독 신앙을 진보주의, 보수주의, 중도주의, 맑시즘, 신자유주의 등과 같은 세속 이데올로기로 환원해선 곤란합니다. 각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일반은총의 광휘를 직시하되, 죄로 물들어 있는 부분을 분별해내는 비판적 수용이 필요합니다.

 

이제 강연에 대한 두개의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교수님께서는 사회분화현상이 “네덜란드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독특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강연에서 정의된 사회분화현상이 “이념과 종교에 따라 사회가 분화된 현상”이라면, 이러한 사회 분화의 모습은 근대화된 국가에서 대부분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각각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념과 종교에 따라 교육, 언론, 정당 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근대국가들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회분화현상을 네덜란드 특유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혹 네덜란드의 사회분화현상에 대해 좀 더 보충하여 설명해주신다면 이해가 수월할 것 같습니다.

 

둘째,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주장한 국가관이 과연 성경적이고 또한 현시대에 적실성이 있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국가가 종교적 삶을 보장해야 한다고 서술하면서 기독교 강요 제4권 20장 3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칼빈은 국가가 “우상숭배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행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모독 등, 신앙을 대적하는 기타 공적인 범죄들이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거나 퍼지지 않도록 막아”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칼빈의 국가는 종교적 행위에까지 간섭하여 강제력을 행사하는 기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저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는 인격이고, 그 인격체와의 사랑과 믿음은 국가의 물리력으로 강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의 국가관을 상기해 볼 때, 우리에게는 칼빈주의에 대한 호의적 수용뿐만 아니라, 비판적 수용의 여지도 있는 것이 아닌지, 교수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1] 칼빈주의, 라스베거스 공항을 가다, 12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