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소감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인문학 영역에서 상품에 대한 비판이 비례하여 격렬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품의 거대한 집적”으로서의 자본주의가 배태시키는 인간 소외의 병리적 현상들이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품 비판, 자본주의 비판이 사적 유물론에서 통찰했던(“결정론”의 맹점이 있긴 하지만) 혁명을 위한 물적 토대의 발효를 지나치게 도외시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영화 매체에 대한 인문학의 비판적 고찰도 “상품 비판”에 경도된 측면이 짙다.
영화들에 내재된 부박한 자본주의의 상품 전략에 말려들지 말라는 인문학적 설교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근신하라 너희 대적 상품이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렇듯 상품을 악마화하는 종교적 레토릭들도 출판 시장에서 서적 상품으로 판매된다는 점이다. 혹은 거대 자본에 의해 구축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타고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소비된다.
자본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발전 종국에 혁명을 위한 물적 토대가 무르익을 것임을 기대하는 것이 사적 유물론에의 균형 잡힌 독해라면, 영화 상품에 대해서도 그것이 품고 있는 혁명적 맹아를 꿰뚫어 볼 줄 아는 것이 유물론적 사유의 적절한 흐름일 것이다. 따라서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영화 상품에 대한 혁명적, 정치적 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게다가 영화 상품은 새로운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수리과학적 사유구조의 병적인 확장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근대성 비판의 핵심 축이었는데, 탈근대적인 철학자의 입에서 근대과학의 힘을 긍정하는 상찬이 쏟아져 나오는 것 또한 흥미롭다. 이것 역시 비판의 대상을 역으로 이용하여 그 대상을 내파하는 유물론적 전략의 일관된 맥락에 위치한다.
2. 의문사항
1)소설 <도가니>가 영화화되고 그것이 입법부와 사법부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낸 점은 영화 상품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훌륭한 예시이다. 그런데 정치적 메시지가 직접적이지 않은 일반의 영화 상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혁명에 기여할 수 있는가? 벤야민은 영화의 역할이 단순한 메시지의 파급뿐만이 아니라, 제2의 기술에 인류를 적응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벤야민이 주장하는 제2의 기술에 적응함으로써 인류는 어떻게 혁명으로 나아가는가?
2)제2의 기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몽타주로 조립된 개선 가능한 영화의 기술적 기반을 제2의 예술이라 부르는 것인가?
3)영화는 몽타주의 기법으로 만들어지고 그것은 기존의 연극 및 교향악과의 차이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를 영화 관객들이 인지할 수 있을까? 영화관에서 보여지는 영화는 한 편의 완결되고 통일된 전체이다. 영화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제작자가 아닌 이상에야, 대중들이 영화의 몽타주적 성격을 확연하게 인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4)벤야민의 정치적 예술은 결국 예술, 더 구체적으로는 영화를 통한 계몽 프로젝트가 아닐까? 계몽은 여전히 중요한 주제일 수는 있겠으나 최종 목표가 계몽이라면, 그 수단으로서 영화는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차라리 학교 교육을 바꾸는 게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3.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드러난 벤야민의 예술론
벤야민의 예술론은 유물론적이다. 다시말해 물적토대와 생산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 영역으로서 예술을 고찰한다는 뜻이다. 벤야민이 주목한 현대 생산조건의 특이점은 복제기술이다. 이전에도 복제기술은 있어왔지만 현대적 의미의 복제기술에 비하면 그것은 복제라기보다는 조야한 모방의 수준이었다.
현대의 복제기술이 예술작품에 미친 가장 유의한 영향은 아우라의 위축과 파괴이다. 아우라는 “지금”과 “여기”에 일회적으로 임재하는 현존재이다. 이에 반해 복제된 예술품들은 수용자로 하여금 일회적 감상이 아닌 반복되는 대량의 복제품들을 접하게끔 한다. 그렇다면 복제를 통해 예술품의 편재성을 성취하는 복제기술이, 원본이 지닌 “지금”과 “여기”의 일회적 가치를 하락시킴으로써 아우라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아우라의 소멸은 곧 예술작품이 전통적으로 담지해온 제의가치의 상실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인 아우라를 발생시키는 “유일무이한 가치”는 의식(Ritual)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앞선 시기의 예술작품들이 종교 예식에 쓰였던 것처럼 아우라의 존재방식은 의식적 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종교예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예술작품일지라도 그것은 “세속적인 형태의 숭배행위”를 통해 제의가치를 구현한다.
제의가치를 상실시켰던 복제의 바로 그 원리에 의해 예술작품은 전시가치를 획득한다. 복제기술이 수많은 복제품을 만들어냄으로써 예술작품의 전시가능성은 급증했다. 이제 예술작품은 종교인과 귀족 등의 특화된 계급을 넘어서 수많은 대중들에게 전시된다. 예술작품을 지근거리에서 향유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욕구는 복제기술이 직조한 전시가치에 의해 충족된다.
영화는 복제기술이 예술의 질적 변혁에 끼친 영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시이다. 영화가 복제하는 것은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을 복제하는데 그 과정이란 영화를 제작하는 카메라와 전문가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기계화된 테스트이다. 그리고 이 기계화된 테스트들의 복제물들을 조립함으로써 영화는 몽타주적으로 완성된다. 조립된 구성물인 영화는 따라서 개선과 변형이 매우 자유로운 예술작품이다. 복제상들의 위치를 바꾸고 삭제 및 삽입의 편집이 자유로운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제 조립된 영화는 대중들 앞에 전시된다. 영화의 전시는 대중들의 동시적 감상을 가능하게 한다. 전통의 회화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위계적으로 향유되어야 한다는 제의적 강박을 지니고 있었던데 반해, 영화는 영화관에 운집한 대중들에 의해 집단적이고 동시적으로 전유되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호출한다. 개별의 감상이 타인의 감상과 만나게 되고 이러한 집단적인 감상의 조율과정 속에서 예술작품의 향유는 대중적 사회성을 띠게 된다. 나의 감상은 타인의 그것과 비교되면서, 감상은 비평이 되고 영화는 비판적으로 수용되기에 이른다.
이렇듯 대중적, 사회적 감상 형식을 띠는 영화는 촉각적 수용기제를 통해 혁명의 컨텐츠를 채워나간다. 정신분산적 요소인 촉각은 역시나 영화의 몽타주적 성격에서 기인한다. 복제상들을 필름 위에 나열하고 조립하는 것은 그것들의 연속적 교체를 뜻하는데, 이러한 상들의 연속적 교체가 수용자의 눈에 쇄도함으로써 시각적 충격이 가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가해진 충격은 곧바로 감상의 촉각적 요소로 전환된다. 이제 촉각적 감상과 수용은 부지불식간에 학습되고 익숙해지는 습관의 감상 태도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벤야민은 당대의 어려운 예술적 과제가 대중적이고 사회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어려운 과제를 회피하려는 대중들에게 예술의 혁명적 요구를 시나브로 자연스레 관철시키는 데는 정신분산적 요소인 촉각의 습관만큼 유용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통찰했던 예술의 과제는 사람과 기계 사이의 균형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은 기계의 리듬에 인간을 종속시킨다. 이것은 인간적 리듬과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헌데 똑같이 기계의 리듬 위에서 일하는 영화배우는 기계 앞에서도 인간성을 당당하게 구현한다. 기계화된 테스트 앞에서도 인간성은 소외되지 않는다. 영화배우는 기계의 테스트에 당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화를 보는 대중, 곧 인간들에게 테스트되고 컨트롤되기 때문이다. 기계를 통해 인간과 인간이 집단적, 사회적으로 매개됨으로써 인간성은 고양된다. 기계의 폭압을 분쇄한 인간성의 승리를 구가하는 것이 벤야민의 예술적 과제의 한 축을 이룬다.
카메라의 영화는 영화배우만을 연출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구조도 연출한다. 기계의 섬세하고 강렬한 눈을 빌어 포착한 세계는 인간의 활동 공간을 확대하고 심화시켜준다. 영화가 선사하는 시각적 경험의 증폭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모두를 포괄한다. 특히 후자의 비정상적인 것들이 영화에 연출될 때 수용자인 대중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병리적 징후들을 예리하게 느끼며 사회변혁적 에너지에 노출된다. 물론 익숙한 습관의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결국 벤야민이 통찰했던 복제기술의 예술작품은 그것 특유의 기술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예술작품들보다 훨씬 더 혁명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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