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교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구원이 필요한 이유와 그것을 이루는 구원자, 그리고 구원이 이뤄지는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따라서 이 책은 죄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이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무한한 지혜,무한한 사랑,영원한 생명)을 공급받는 탯줄이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죄로 인해 자기 자신의 유한성에 갇혀 버린 인간은 죽음, 갈등, 살인, 파괴로 점철된 역사를 영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한다. 스스로 구원을 능동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2:13) 이 말씀은 이론적 진술이다. 유한한 지혜와 유한한 정의감, 유한한 사랑을 가진 인간은 율법을 완벽하게 행할 수 없다.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결국 성경은 인간내부에 구원에 대한 어떠한 가능성도 남겨놓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즉 행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모든 시도는 좌절된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렇다면 예수가 누구이길래 우리의 구원자라는 말인가? 김세윤 교수는 4복음서에 나타난 “인자”라는 예수의 자기호칭을 파헤침으로써 예수의 정체에 접근한다. “인자”는 한글 뜻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원어를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가 가리키는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7장13절의 ‘인자 같은 이’이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7:13)
그 인자 같은 이는 구름을 탄 신적 존재이지만 사람의 형상을 하고있다. 그가 주의 종으로서 고난을 받아 죄 사함을 이루어(사53장) 새 언약을 세우고(사42:6),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을 창조한다(단7:18).
따라서 예수께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독특한 칭호를 사용한 것은 자신이 다니엘7장13절에 나와있는 ‘그 인자 같은 이’이고 ‘그 인자 같은 이’는 구름을 탄 신적인 존재, 즉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이렇듯 “나=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선포가 아닌, “나=다니엘 7장의 ‘인자 같은 이(신적인 존재)’=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간접적 동일시’를 사용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메시아를 원했던 왜곡된 메시아 대망이 초래할 십자가 사역의 방해를 피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메시아 직분을 드러내는데 “인자”라는 칭호가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 유대인들이 예수를 로마로부터 독립을 가져다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면 주님의 지상사역은 큰 지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들을 귀가 있는 자들만 깨닫도록 “인자”라는 칭호로 그분을 조용히 계시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성경의 약속대로 “인자”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함으로써 마귀를 멸하고, 하나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신인류를 창조하셨다.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객관적인 구원사건과 개인의 주관적인 삶을 이어주는 가교가 믿음이다. 율법의 저주라는 형벌을 받아 옛자아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아나는 일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접붙임됨으로 가능한데, 그 연합을 믿음이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을 시각화한 것이 세례이다.
그런데 이신칭의의 교리를 왜곡하여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다.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키는 도덕폐기론이 그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 이후의 삶에 무책임해도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진 교인들이 많다. 그들은 교인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행위의 열매가 구원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의 열매는 (순종의)행위이다. 왜 그런가? 믿음의 대상이 ‘주’ 예수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고백이 믿음이다.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신앙고백이고 이를 통해 주인과 종의 주종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종관계를 부정하는 불순종의 언행은 예수를 믿는 참된 믿음이 없음을 ‘증명’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완벽할 수 없다. 죄짓고 회개하는 것을 반복한다. 하지만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며 죄를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이기려는 노력을, 자신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being)가 행위(doing)에 앞선다. 그리고 존재가 그 존재에 걸맞는 행위를 흘려보낸다. 행위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주인 되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으로서의 존재이며, 종으로서의 마땅한 순종의 삶을 살아낸다.
믿음은 삶의 총체이다. 일요일, 예배당이라는 제한된 물리적 시공간에서의 신앙생활이 자신의 구원을 보장한다는 거짓복음에는 물리성을 초월하는 영생의 구원이 없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7:9,10)
혼전순결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면서, 음란물에 빠져 있으면서, 술과 담배로 성전된 자기 몸을 더럽히면서, 하나님이 아닌 물신에게 경배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압제하면서, 교회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나는 구원을 얻었노라’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미암은 믿음(롬11:17)의 세계관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가지 않는 교인은, 구원 없는 귀신의 믿음(약2:19)을 삶 전체를 통해 증명하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이것의 총체성을 깨달아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구원의 삶을 살아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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