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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0년]종교의 자유와 고교 평준화는 공존 불가능한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기독교인이 사회윤리적 사유를 함에 있어서 예수의 황금률은 공리적 출발점이다. 종교의 자유와 고교 평준화의 충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점을 찾아갈 때도 상대의 입장에 서보는 원리는 역시 유효하다. 그래서 있음직한 상황을 설정하여 이 문제에 접근해보려고 한다.

(픽션)

A군은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불교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로 진학했다. 서울은 평준화이지만 A가 살고 있는 경기도는 비평준화이기에 무리 없이 원하는 종교 사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1,2학년 동안 학급에서 종교부장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고3이 된 A. 그에게는 중학교 친구 B가 있었다. 절친이었지만 그는 개신교인이었다. A못지 않게 종교적 열심히 컸던 B는 A가 구원받아 새 생명을 누렸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 중학교 때부터 줄곧 기도를 해왔다. 그리고 모두가 수능 준비로 바쁜 여름방학에 B는 A에게 자기 교회의 수련회에 가자고 제안한다. 주님의 강권적 역사하심으로 A는 B의 제안에 흔쾌히 응하여 수련회에 따라가는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정교한 소설도 아니고, 논의의 전개를 위한 픽션이니 개연성 희박한 사건에 의아해 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실 전능하신 우리 주님이 못하실 것도 없다.) 그리고는 그간의 기도의 열매가 수련회에서 부흥강사의 설교에 감복한 A의 회심으로 맺어졌다! 오…B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수능 막바지에 골수 불교신자가 주님께 돌이켜 새로운 피조물이 되다니. 사람을 낚는 주님의 제자 B. 낚아도 아주 월척을 낚았다.

근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A의 급격한 회심은 학교 당국과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불교 사학인 그 학교에서는 법회에 참석하는 것이 전교생의 의무이다. 비평준화 지역이니 모두가 선택해서 들어온 학교였고 따라서 의무적인 법회 참석에 반기를 드는 학생도 없었다. 그러나 A가 최초로 법회에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항명을 했다. 왜? 기독교 신자로서 이교도의 예배 의식인 법회에 참석하는 것은 그의 신앙 양심상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앉아만 있으래두?”선생님이 제안하지만 A는 그럴 수 없었다. A에게 법회를 참석하는 행위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새로이 형성된 인격적 존재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었다. 다른 기독교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A의 신앙 양심은 그에게 법회 참석을 하지 말라는 강력한 음성을 끊임없이 흘려 보냈다. 목탁과 염불 소리에 정기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A 자신의 영혼을 좀먹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게 뻔했다.

매우 신실한 불교도였던 A가 개신교도가 된 것도 모자라서 법회를 거부하기까지 하는 행위는 학교 당국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재단 이사들과 교장 및 교사들은 짧은 토의 끝에 A를 전학 보내’버리기’로 결정한다. “너의 자유를 찾아 개신교 사학으로 전학 가라.” 하지만 이런, 지금 시기는 여름방학이 끝난 9월. 11월 수능까지 80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급박한 시기였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정든 친구들, 선생님들.. A에게는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다. 단지 종교 의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교기관도 아닌)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쫓겨날 판이라니, 이만저만 속상한 것이 아니다. A에게는 전학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시간, 수능 공부 리듬이 방해 받는 것, 새로운 교복을 구입하는 것 등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할 심리적, 학업적, 금전적 불이익이 막대하다. 예수를 믿는 것은 과연 고난 길이라는 것을 새신자 때부터 몸소 체험하는 A를 우리는 긍휼히 여겨야 한다. (픽션 끝)

 

위 가상 사례를 토대로 조금만 깊이 생각해본다면, 평준화와 비평준화가 중등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종교의 자유 이슈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다. 학생의 학교 선택권이 보장된 비평준화 제도일지라도 선택하여 들어간 교육기관에서 성실히 학업을 이어가던 학생이 개종하는 사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개종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기독교의 선교도 가능한 것이다.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온 나를 혹은 나의 자매와 형제를 강제 전학시키는 것이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자행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권력 관계에서 약자인 학생이야말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 당하는 것이 아닐까?

혹자는 퇴학 처분을 내리지 않고 타학교로 전학 가도록 배려한 것은 학생의 종교적 자유를 지켜준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자유의 보장’을 선명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보장은 보호와 증진을 의미하는데, 신념에 따라 무엇인가를 선택했을 때 - 그 선택이 초래하는 결과가 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아니라면 - 적어도 불이익은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양심과 종교적 자유의 ‘보장’이다.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불이익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증진하기는커녕 위축시키는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학을 강제하는 것은 당사자인 학생에게 매우 큰 불이익을 감당하게 한다. 따라서 학생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심각한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퇴학에 준하는 강제 전학 조치를 취하는 일은 종교에 따른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종교적 신념에 따라 교육하려던 건학 이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몇몇의 종교 의식 거부 행위가 건학 이념에 심각한 위협이 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갖는 혹은 개종으로 인해 갖게 된 학생에게 건학 이념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외려 그들의 건학 이념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글에서 시도할 것이다.)

평준화 정책이 입학 단계에서 학생에게 학교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침해하는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적 사안에 한에서는 양심에 따른 학교 선택권을 부여하는 일을 교육 당국이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학생의 선택이 종교적 신념으로 인한 것인가에 대한 진정성을 검증하는 의무는 교육 당국에 있다. 자유민주국가는 시민의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고 증진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입학 시 종교 사학에서 교육을 받고자 하는 학생에게 선택권을 보장하는 세심한 행정적 배려를 통해 고교 평준화와 종교의 자유는 충돌을 피해갈 수 있다. 평준화 제도에 솟아 있는 뿔을 뽑으면 되지, 전체를 허물어뜨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관료적 합리성마저 무시해버리는 끈적끈적한 고교 학연의 폐해, 수월성 교육이 아닌 교육의 양극화를 초래하며 중학생들을 입시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비인간화, 각자의 은사를 압살해버리는 획일적인 고입 교육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비평준화의 문제를 근절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 평준화이다. 평준화 정책의 취지와 목적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또한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 정신과 현행 교육법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서 평준화를 뺑뺑이 민주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철학의 빈곤이요 생각의 파산, 지적 자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게다가 강의석 사건과 비슷한 갈등은 입학 단계가 아닌 재학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입학 단계에서의 선택권을 보장한다고 해도 급작스러운 개종으로 인한 학생 개인과 학교의 충돌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만약 학생의 개종에 종교 사학이 강제 전학으로 대응한다면, 전술했듯이 이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선택에 불이익을 초래함으로써 헌법 정신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결국 종교 사학이 다른 종교를 가진 학생에게 인내를 가지고 건학 이념을 자율적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인격적이고 성실한 노력을 경주하는 것 외에는 중고등학교에서 발생하는 종교 문제를 푸는 본질적인 해결책은 없다. 인간 내심의 성소인 양심을 성령의 역사가 아닌 인간적인 강제와 추방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반()성경적이고 중세적인 사고방식을 버릴 때에만 한국 사회에서 왕왕 벌어지고 있는 강의석 류의 사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