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를 해고한다. 그럼으로써 절감되는 비용, 그리고 값싼 물건을 사며 좋아하는 소비자. 이름모를 다수의 생계와 맞바꾼 이윤의 증대 및 소비자의 만족. 수량적 노동 유연화로 유리해지는 사람의 이득은 미미하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탈규제로 손해를 보는 사람은 생계의 박탈과 심리적 상실감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이 우리를 인간되게 하는 그것인가. 자본가가 겪는 이득의 어려움이 노동자가 부딪치는 생존의 어려움과 비교될 수 있을까. 자본가와 노동자 둘 다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본적 욕망의 포효에 반응해야 하는가 절박한 생존의 울부짖음에 답해야 하는가.
시장과 전쟁은 닮았다. 전자가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서, 후자가 정치가의 야욕을 위해서 인간의 생명을 냉엄하게 낭비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한쪽에게는 패배와 죽음을, 한쪽에게는 승리와 영광을 준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래서 시장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점차 많은 부분이 전쟁을 닮아간다. 물러설 곳 없는 건곤일척의 싸움이 로망이 된 사회, 그것을 찬양하는 사회는 분명 야만적이다. 마초적 본능은 물리적 근육의 언어가 아닌, 이제는 금권력의 시현을 통해 번역된다. 노동 즉 인간과, 토지 곧 자연에 대한 지배권으로 표명되는 자본은 야수성을 머금은 인간 본능의 번안된 형태이다. 우리는 아직도 문명화되지 못했다.
지구 반대편 원주민의 삶을 방영하는 다큐멘터리는, 우리 사회가 야만적이지 않으며 문명화되었다는 착각을 공고화하기 위해 봉사한다. 마치 이 사회가 감옥이고 미쳤다는 사실을 은폐하려 저쪽에 감옥이 있고 이쪽에 정신병원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자본에 놀아나는 놀이공원 같은 사회가 미국이 아니고 한국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증명하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있고 에버랜드가 있는 것처럼. 속지 말아야 할 것에 속아나는 우리. 그래서 우리는 광대고 영화의 영원한 테마가 될 것이다. 매트릭스와 인셉션. 사회 구조와 심리 구조의 부조리를 지적하며 또 한번 대박을 치는 자본. 위대한 승리. 빠져 나갈 길 없는 미로. 결국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는 필연적 요청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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