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록펠러가 회심을 했다면? 그의 신앙 행위 결단의 중심은 무엇이 될까?
록펠러는 석유 황제였다. 록펠러든 로마의 황제든 권력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은 순수한 의미의 개인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은 구조의 인격적 화신이며 제도의 대갈못이다. 그런 그들이 회심을 하면 당연히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즉 사회구조적 행위가 그 사람 신앙 행위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 행위를 할 때 그의 내면이 동시적으로 바뀐다고 할 수도 있고 또는 믿음과 신앙고백이 초래하는 필수적이고 즉각적인 행위(열매)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분명한 것은 정경유착과 무자비한 학살적 기업인수 등 사악한 기업시스템의 정점에 있던 록펠러의 신앙 역량이 집중되어야 할 곳은 단순한 대면관계에서의 미덕실천이 아니라 제도개혁의 그것이라는 점이다. 십일조를 내고 자선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이 초래한 수많은 중소 기업가의 짓밟힌 삶의 터전을 보상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면 그것만큼 야무진 착각은 없다. 가뭄을 몰고 온 후 펌프 하나 무료로 설치해준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생각하는 게 얼마나 역겨운 위선인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이라면 모두 동의할 게다.
자신이 영속화시킨 제도를 바꿀 힘이 있는 자들, 그 권력자들의 회심은 필히 제도변혁의 좁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비서에게 친절을 건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재생산하는 제도를 창조적으로 해체한 뒤 재형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볼 때 본질적이고 확고하며 제1차적인 신앙 행위를 대면적 인간관계에 한정하려는 신학적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고 무익한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신학적 상상력의 궁핍과 신학적 사유의 부박함이 빚어낸 이 독단론. 지겹고 끈질기게 들러붙는 이 묵은 착각과 오류가 교회에서 추방되면 될수록 교회는 진보하게 될 것이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지향하는 성장과 진보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라는 성경의 말씀을 받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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