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에는 분명 위계가 있다. 인간의 가치가 동물의 그것보다 상위의 것임은 틀림없다. 또한 소유의 권리보다 인격의 권리가 우위에 있다. 인간 생명과 직결된 권리들은 기업할 자유, 법인체의 집단적 자유가 침범할 수 없는 고결함을 지닌다. 물론 가치간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전술한 사례들을 확장하여 무한히 병렬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처럼 가치의 수직적 질서는 우리 삶을 가득 메운 공기적 질료이다.
그러나 가치의 위계질서가 곧 그 가치를 다루는 수많은 직분과 직업의 위계까지 자동으로 규준화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은 - 비록 각양의 상이한 가치들을 다루지만 - 동등한 도덕적 무게를 지닌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사람이 개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이것이 곧 개를 돌보고 치료하는 수의사보다 사람을 돌보는 목회자의 직업이 영성과 도덕성에 있어서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될 수 있다(고전10:31). 바울은 그런 견지에서 로마의 고대 노예에게 하늘의 상급이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위로를 전한다.(골3:22-25) 가장 좋은 것은 노예로부터의 해방이겠으나, 당장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노예의 일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귀한 사역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을 선언하며 그 다양성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온전해짐을 이야기한다.(고전12:27-30)
방언 은사가 예언 은사만 못하다고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고전14:5) 이는 방언 은사가 자신의 덕만 세우고 교회의 덕은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타인을 섬기지 않는 일은 타인을 섬기는 일보다 영적인 진리치를 적게 함유한다. 하지만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직분은 다 남을 섬기는 일들이다. 공장 노동자든, 고대 로마의 노예였든, 목회자이든, 에스라 같은 학자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발휘해 사회와 이웃을 섬기는 것은 남의 덕을 세우는 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도덕적, 영적인 위계질서가 성립되지 않는다.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바퀴살의 수평적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직분과 사역의 동등성이 가치의 위계질서를 해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개와 인간 사이의 관계로 살펴보자. 창조세계를 돌보고 새창조를 준비하는 맥락에서 개를 먹이고 돌보는 것은 신앙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인간을 양육하는 정성된 일과 평등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개를 돌보느라 인간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인간과 개 사이의 가치 위계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도덕의 영역으로 전환된다. 부도덕의 영역에서는 이미 신앙적, 도덕적 의미를 부여할 여지가 사라진다. 단죄와 교정만이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기업의 생산 및 판매활동은 국민의 물적 토대를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기업의 이윤 추구가 비인간화를 도모하며 탐욕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국민경제의 잠재력을 갉아먹는다면 그것은 사회적 시민권과 정치경제적 시민권을 공격하는 악한 시도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가의 일이 시민단체의 그것보다 도덕적으로 근수가 적게 나간다는 게 아니다. 가치의 위계질서 – 여기서는 이윤추구보다 위에 있는 인간의 가치 – 를 깨는 기업활동이 다른 직업들과 맺는 긍정적이고 동등한 연결지점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들의 집합체인 교회의 사역에도 적용할 수 있다. 기독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좀 더 구체적으로는 복음이다. 그런데 이 복음이 표출되는 방식에는 크게 세가지가 있다. 첫째, 복음 전도이다. 둘째, 세계 변혁적 참여이다. 셋째, 창조세계의 보존과 장차 도래할 새창조와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문화활동이다. 이 세가지는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거대한 섭리의 인도에 따라 모자이크적 조화를 이룬다.
이들 사역 간에 영적,도덕적 무게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가치의 위계적 차이는 있을까? 하나님의 영광을 이웃을 섬기는 차원에서 실현하는 사역이고 직분이라면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하지만 영혼, 육체, 사회, 창조세계라는 각각의 사역 대상물들의 가치 사이에서는 우열관계를 따질 수 있을까? 심히 어려운 문제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들 사이에 정치(精緻)한 경계선과 피라미드적 질서를 규정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인 영혼,육체,사회,세계에 대한 그분의 압도적인 관심을 몸소 체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사역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일이 더 본질적이고 확고하다는 착각은 교만과 무지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속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정초하신 위계질서를 머금은 원형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놓여있는 원판. 그 원판은 복음을 원의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사역들이 피자조각처럼 고르게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각자의 색깔을 머금은 직분들은 가치의 공고한 원뿔 위에서 힘차게 회전할 때 화려한 색채를 내뿜는다. 그러나 어느 한 직분이 과하게 자신의 지분을 요구한다면 원판의 균형은 깨지고 궤도를 이탈한다. 또한 가치의 위계가 부서질 때, 즉 원뿔의 피라미드가 붕괴될 때 원판도 비스듬히 추락하고 만다. 수직적 질서와 수평적 질서의 조화만이 아름다움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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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과에 따라 우리는 상을 준다. 모든 일들의 영적,도덕적 무게가 같다면 차등하여 상을 줄 이유가 있는가? 노력과 수고에 따라 차별을 두어 보상하는 것은 같은 직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직분간 위계를 따지는 게 아니라 직분 내에서 노력에 따른 성취에 비례하여 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서 직분간 금전적 보상은 천차만별이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첫째로는 각 직분 수행에 들어가는 노동량에 따라 보상된다고 볼 수 있고. 두번째로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본래의 노동력에 따른 경제적 가치를 왜곡하며 과도한 보상 또는 과소한 보상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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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어떨까? 죄도 본질적으로는 동등하다. 하지만 모든 죄가 도덕적으로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죄질 비례의 원칙으로 처벌하는 게 타당하다. 그 죄질이란 죄가 파괴한 가치의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 상위의 가치를 파괴할수록 죄는 무거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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