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그분 주장의 요인즉 가난을 타파하고 약자를 돕기 위해서는 실질적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 물질에서 나오는데, 물질을 얻는 것은 세상에서의 높은 곳에 올라감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고지에 오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답지론과 고지론, 이 두 이론이 가진 오류는 신앙고백에 필수적이지 않은 요소를 필수화했다는 것이다. 고지를 택하든 저지를 택하든 그것은 선택과 관용의 영역이지 신앙인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될 십계명 같은 사안은 아니다. 성경의 프리즘이 분사하는 하나님 영광의 빛깔은 고지와 저지(미답지도 포함), 그리고 그 양극단 사이를 메우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폭넓게 뿜어내기 때문이다. 요셉은 고위직에 올랐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였고, 노예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따지자면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서 시행한 정책이 국가 전체의 가난을 해결했다는 측면에서, 노예시절 행했던 멋진 일들에 비해 훨씬 월등하다. 바로 이 곳, 즉 "경험적 결과"를 중시하는 지점에서 고지론이 등장한다. 가장 혁혁한 결과, 우리가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뛰어난 결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저지에 있을 때가 아닌 바로 고지에 있을 때이다. 이건희 회장이 기부하는 것의 결과는 사회적 가난 해결에 있어서 한낱 범부의 기부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렇다면 고지론을 "결과주의에 포획된 빗나간 사랑"정도로 정의할 수도 있겠다. 가난한 자들을 정말 사랑해서 돕고싶은데, 그러자면 가난 해결에 필요한 돈과 영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많은 부와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저 높은 곳, 고지에 올라서야 한다, 이런 논리의 흐름을 고지론은 가지고 있다. 시작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방향타가 고장났다.
여기 부자와 과부가 있다. 부자는 헌금을 많이 냈고 과부는 두 렙돈만 냈다. "결과"의 측면에서 보자면 당시 유대 성전의 재정과 종교 예식에 기여한 것은 부자의 헌금이었다. 과부의 헌금은 결과적 측면에서 보자면 하잘 것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시고 높이 사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의미"란 결국 그분의 성품, 뜻,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뜻한다. "결과"에서는 부자와 과부가 현저한 격차를 보였으나, "의미"에서는 순위의 역전 내지는 동등성이 달성된 것이다.
고지에 가서 가난한 자들을 많이 도울 수 있다. 겸손한 자세로 섬겼다면 정말 "의미"있는 일이다. 반면 저지에서 살아간다면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물질적 가난을 효과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저지의 삶이라면 그 또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다시말해 저지냐 고지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창출하면서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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