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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명량>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이라는 황당함

관객수 160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긋고 있는 <명량>에 대한 역사 왜곡 논쟁이 뜨겁다. 그 중심엔 극 중 등장하는 실존 인물인 배설 장군이 있다. 영화 속에서 배설은 이순신을 암살하려 하고 거북선을 불태운 뒤 도주하다 아군 장수의 화살에 맞아 절명한다. 이는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다. 역사에서 배설은 이순신 장군 암살을 시도한 적도, 거북선을 불태운 적도 없다. 이에 배설의 후손들은 비대위를 꾸려 문화체육관광부에 <명량>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놓은 상태이다.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심산이다.

 

배설 후손들의 반응은 과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오바를 추동하는 용감함에는 영화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가 깔려 있다. 영화의 목적은 허구(fiction)를 이용해 관객에게 감동(정서적 감동 뿐 아니라 관객의 행동을 바꾸는 행위적 감동도 포함한다)을 주는 것이다. 감동을 위해 가상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영화의 본질이다. 사실에 기반한 팩션(faction) 장르의 영화라고 다를 게 없다. 영화 바깥의 실재적 사실관계는 영화 원작 정도의 기능을 한다. 영화에 적합한 사실관계라면 그대로 차용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상당한 각색과 변형을 거쳐 영화에 적용된다. 생략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영화의 모든 요소는 영화적 감동이라는 최종 목표에 복무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팩션 영화와 관련을 맺고 있는 현실 속 사실관계라고 예외일리 없다.

 

따라서 영화가 얼마나 일대일로 현실 속 사실관계와 매칭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현실을 잘 모방했는가의 여부는 영화 평론의 잣대로 기능할 수 없다. 다만 영화 내적 논리의 일관성과 개연성이 확보되면 족하다


↑<명량>포스터



 

사실관계가 작품의 본질을 결정하는 장르는 일반의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또는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이다. 다큐멘터리는 애초에 사실관계를 영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쇄매체에 비유하자면 영화는 소설이고 다큐멘터리는 역사책이다. <명량>은 영화이지 KBS 역사스페셜이 아니다. 그런데 왜 <명량>에게 역사적 사실관계의 엄밀함을 요구하는 것인가? 이는 명백한 범주오류이다. 픽션 <명량>에는 역사왜곡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여지가 없다.

 

영화를 현실의 모방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플라토닉한 이데아 예술론에 불과하다. 플라톤은 예술을 철학에 비해 저열하다고 봤는데, 이는 예술이 이데아(최고의 실재)를 모방하는 현실세계의 아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좋은 예술이란 예술 바깥의 실재 세계인 이데아를 최대한 그럴듯하게 재현해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플라토닉한 이원론적 예술관을 가진 이들에게 <명량>의 허구적 요소들은 불쾌함을 넘어 불량해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재-모방의 이데아적 관점보다는, 예술 자체, 영화 자체를 또 하나의 병렬적 세계로 인정하는 것이 제예술 장르의 본질에 보다 적합한 예술관이다. <명량>의 이순신과 현실 속 이순신을 전혀 다른 세계, 이를테면 평행우주의 서로 다른 인물로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영화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이 둘 간에 논리적 연관성은 미약하다. 다만 <명량>‘500년 전 조선 앞바다라는 서로 다른 세계가 있고, 우리는 이 둘 사이를 비교, 대조하는 와중에 드러나는 삶의 의미를 향유하면 된다.

 

다만 영화 <명량>의 배설과 실제 인물 배설을 헷갈리는 관객이 있을 수 있으니, 그들에게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려주어 혼동을 방지해줄 필요는 있다. <명량>과 역사가 서로 다른 평행 우주라는 사실을 인지시켜주자는 말이다. 배설의 후손들이 했어야 할 역할은 딱 여기까지였다. 이것을 넘어서는 제재의 움직임은 영화 장르에 대한 몰이해를 시인하는 월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