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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1년]미운오리새끼는 한국에서 어떻게 되었나

 

어릴 적에 들었던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 고전적 내러티브의 묘미는 무한한 색조로의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미운 오리새끼도 마찬가지다. 지금 나를 매료시키는 미운 오리새끼의 매력은 무엇일까.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 청출어람 청어람의 교훈을 끌어내기에 적합해 보인다. 그래서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유교도덕의 인간관계론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해방감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 특유의 질료적 저항을 고려한다면 미운오리새끼의 해피엔딩을 낙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다시 더듬어 보자. 오리들이 우글거리며 살고 있는 공간에 모양도 특이하고 걸음걸이도 이상한 오리새끼 한마리가 들어온다. 다름을 적대적 세력의 표지로 간주하는 유아론적인 오류는 곧바로 낯선 오리새끼를 배제와 소외의 희생양으로 삼는다. 더 큰 문제는 그 새끼오리를 타자화하는 데 어미 오리의 권위가 최종적 승인을 한다는 점이다. 돌연변이적 특이함을 무례한 시건방과 공동체에 대한 위협적 요소로 바라보는 냉혹한 시선의 중심에 어미오리가 있다. 억압 구조의 궁극적 수호자로서 어미 오리는 교육과 도덕의 이름을 빙자해 한마리의 오리새끼를 미운 오리새끼로 낙인 찍는다. 미움의 낙인은 그 새끼오리를 향한 경원과 백안시를 증폭 재생산한다. 약자에 대한 증오를 생산하는 도덕은 바리새적 율법의 본질적 특징이다. 오리들이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진입해도 형식만 세련되었을 뿐 여전히 배제와 따돌림의 기제는 활발히 작동한다.

 

미운 오리새끼에 불과했던 오리가 어느 순간 긴 다리와 우아한 날개의 새가 되어 있다. 차원의 준위를 한 단계 고양시킨 존재로 서있다. 그는 애초에 오리가 아니었다. 지상에 불시착한 선녀처럼 오리 틈에 잠시간 살았던 백조였던 것이다. 이제 길고 흰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백조는 자신의 존재 위에 덕지덕지 붙었던 치졸하고 유치한 딱지들을 창공의 청풍에 실어 보낸다. 그에게 아무리 오리새끼라는, 게다가 미운 오리새끼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그의 존재가 내포한 백조로서의 무늬결은 훼손되지 않는다. 이름짓기를 통한 낙인이 고통과 슬픔의 유소년기를 구조화할지언정, 살아있는 자의, 포기하지 않고 버티며 살아내는 자의 솟아오르는 실존적 정체성과 생명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 별들이 돌아 움직이는 밤하늘을 가르며 눈부신 은빛을 발하는 백조. 백조의 주체성을 사멸시키려는 억압의 구조 속에서도 도저히 은폐하고 폐기할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은, 이제 고통의 바다 위에서 부유하며 의미를 찾고자 갈망하는 이들에게 영감과 계시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된다.

 

진리와 진실에 근접해 있는 자의 명철과 지혜는 노인보다 낫다.(시119:1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복음의 빛을 장막으로 가리고 진리를 질식시키려는 전횡이 횡행하는 것이 한국교회이고 한국사회이다. 진리의 호흡이 가빠야 할 공간에 생물학적 선행 사실과 주민등록 기재사항을 높이 쳐들며 봉건 윤리 범주 하의 규범언어인 시건방, 건방짐, 싸가지, 겉멋이라는 폭력적 수사를 너저분하게 풀어놓는다. 실로 진실을 향한 열정과 건전한 질문, 그리고 토론의 생산자는 불쾌한 뮤턴트 내지는 역적이 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살해당한다. 선을 넘는 괴팍함이 프론티어에게 주어지는 영예가 아니라 기피하고 싶고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무례한 상놈의 표식이 된다. (그들에게 무례함이란 아랫것의 윗분을 향한 것일 뿐, 그 반대는 동방예의지국의 고려사항이 아니다.)그 표식은 마치 짐승의 이마 위에 새겨진 사탄의 숫자와도 같은 것이다. 주류 세상의 이단아는 주류 교회의 이단아이며 그 역 또한 성립한다.

 

           한국사회든 한국교회든, 빌어먹을 유교 전통의 어여쁜 시현장인 이 한국이란 공간은 단언컨대 어미 오리들이 새끼 백조를 오리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곳이다. 끝끝내 오리가 되기를 거부하는 백조새끼들에게 어미 오리는 건방지고 싸가지 없다는 동방예의지국 특유의 규정을 부여함으로써 응수한다. 실상 그것은 한 마리 백조의 사회학적 생명에 조종이 울림을 뜻한다. 謹弔(근조). 오리들이 만들고 유지하는 거룩한 위계질서로부터 탈주하여 창발과 수평의 인간다운 질서를 모색하는 백조새끼들은 단순한 질시와 멸시를 넘어선 학살의 킬링필드로 내몰린다. 백조새끼들은 그들의 날개에 힘이 돋아나기 전에 싸늘한 총구 앞에 선다. 죽을 것인가, 다리와 날개를 꺾고 오리로 살 것인가. 날개 힘을 키워 날아오를 희망의 때는 그들에게 너무 멀기만 하다.

 

          미운오리새끼 이야기는 한국에서 극적인 새드엔딩으로 전화한다. 죽어가는 백조의 울음소리가 내뿜는 비극의 파토스. 날아오를 수가 없다. 그러기 전에 다 죽는다. 모양이 다른 새를 백조로 알아보는 한국 사회. 그리고 그 백조의 씨를 말리는 살인적 시스템이 반만년 유구한 역사와 근 몇 십년 군국주의 망령의 정성스런 조탁으로 견고해진 나라. 이곳에서 미운 오리새끼는 끝끝내 높은 하늘의 시원한 밤공기를 날개 아래에 담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