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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1년]보편 이성과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수용에 대하여

 

교정된, 성화된 합리성(sanctified reason)은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다. 그것은 결국 계시 안에서의 교정과 성화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특수성 위에서 획득하는 보편성을 뜻한다.

 

그러나 교정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이성은 보편적일 수 없다. 포스트모던은 우리에게 합리성을 향한 계몽주의적 추앙이 백일몽이란 것을 가르쳐주었다. 서로 다른 문화권마다 일치되지 않는 도덕관과 인권 개념을 볼 때 보편적 합리라는 형이상학적 시도의 좌절은 명백해진다.

 

하지만 교정되지 아니한 이성은 적절한 수준에서 “호소”의 대상으로서 기능이 가능하다. 날 것 그대로의 이성을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검토할 때 그것의 보편성을 “증명”할 수 없지만, 따라서 엄밀한 학문적 작업 속에서 "보편 이성"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정치적,사회적 변혁의 실천을 위한 단초가 될 수는 있다.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완벽하게 타락하지는 않은 인간의 양심, 도덕, 지성에 "호소"함으로써 정의와 사랑의 이중주 위에서 춤추는 변혁을 연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칼빈신학의 “일반은총”이라는 개념이 뒷받침한다. 

 

또한 보편 이성이라는 토대 위에 자리잡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인권 사상은 정치철학의 진주이다. 세속 철학자들의 주의,주장으로부터 우리는 억압이 없는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그들의 철학적 기반은 이성을 절대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그 기반에서 나온 몇몇 산물들은 일반은총의 광휘를 내뿜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된 선물들을 기독교의 틀 안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의 비판적 수용이란 기독교적 전제 위에서 당연히 추론 가능했던 개념에 대해 무지했다는 “깨우침”과, 그 깨우침이 산출하는 사회 변혁을 위한 “호소”적 “실천”을 포함한다. 종교재판과 칼빈의 제네바 성시화라는 사상 최대의 개신교적 정치 실험을 상기해보라. 전통적 주류 기독교의 흐름에서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에 대한 진지한 인권적인 관심은 전무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한 기본권은 “하나님의 형상”(왕의 형상)과 “이웃 사랑”이라는 신학적 틀에서 발전될 수 있는 정치적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러한 추론에 실패했다. 그 과업을 이뤘던 것은 우리가 멸시하고 비난하기 마지 않았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다. 그들의 철학적 오류(보편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는 분명히 지적해야 하지만, 교회가 무관심했던 자리에서 진행되었던 세속 철학자들의 노력이 인권 사상을 발달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그러한 세속 철학자들의 발견 이후에야 기독교는 그 기본권 개념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며 수용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이 기독교의 이웃 사랑을 정치적 기본권과 연결시켰던 것이다.[1]

 

더군다나 한국은 정치적 기본권에 대한 사회문화적 합의가 극히 박약한 공간이다. 이러한 곳에서 자유주의를 철학적,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자칫 자유주의적 기본권을 도외시하게 하는 귀결로 치닫는다면, 이는 역사적 기독교의 추악함에 오류 하나를  추가하는 것일 뿐이다. 비판과 수용의 길항작용 위에서의 건전한 신학적 신진대사가 절실하다.



[1] <죠선크리스도인회보>는 1898년 2월 3일자에서 “하나님의 도를 믿는 나라들이 문명 진보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가 사람 사랑하기를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평등권을 주어 압제하는 풍속을 없애며 서로 권면하여 착한 길로 인도하기를 주장하기 때문” 이라고 했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을 정치적 평등권으로 재해석하는 탁월한 신학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1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