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4년 이전 에세이

[2011년]기독 유물론을 위하여(자유,인간본성,복지)

헤겔에 따르면 법의 기반은 자유의지이다. 어떤 무엇으로부터도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행위하고자 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자유의지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를 침해하는, 더 포괄적이게는 자유의지가 투여된 자유의 표현물들을 침해하는 것은 그 자유에 기반한 추상법에 대한 침해로서 불법이다. 거대한 추상법의 체계를 아틀라스처럼 떠받들고 있는 헤겔의 자유 개념은 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존엄함을 옹호하는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역사의 진보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그의 자유 개념은 혹독한 책임을 인간에게 부여하기도 한다. 헤겔은 법철학 57절에서 “누가 노예라고 한다면 이는 노예가 된 그의 의지 탓으로 돌려져야만 한다. 이는 마치 어떤 민족이 억압당하는 것이 그 민족의 의지 탓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노예를 만들어내는 자들, 또는 억압하는 자들의 불법일 뿐만 아니라 노예와 피억압자들 자신의 불법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자유를 담지한 정신이 육체를 스스로 부정할 수 있는 (자살) 힘을 지닌 것이기에, 물리적 폭압 앞에서 저항하지 않은 것은 자유의지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한국 역사를 한마디로 거칠게 표현했던 것이 생각난다. ‘한국 역사는 비장미가 결여된 그것이다.’ 백제의 의자왕, 고구려의 보장왕, 통일 신라의 경순왕, 삼전도에서 머리를 찧은 인조 등 외세의 침탈이라는 위기의 순간에 무력으로 저항하며 옥쇄(玉碎)를 시도한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그래서 한반도를 거쳐간 수많은 정치세력들의 최후가 비장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반도의 역사는 소극적 의미에서(침탈을 당했기에) 불법을 자행한 역사이다.

 

이미 지나간 시대의 역사를 평하는 정도라면 헤겔의 자유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다. 국제 세계에서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피부로 느낄 만큼의 전쟁 위협 속에서 한국인들이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헤겔의 자유개념이 생활과 긴밀히 잇닿아 있는 이슈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한국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국내 학부대학 출신으로 아이비리그 명문대의 교수로 임용된 한 신임 교수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서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지 않고 안정적인 게 무엇인지 묻기 때문 아닐까요?”[1] 반면에 장하준 교수는 청년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선호하는 현상의 책임을 졸업 후에 그들이 학부에서 열정과 성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것들을 토대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실패 이후에도 재기의 기반이 될 안정적 복지시스템의 미비라는 사회 구조로 귀속시켰다.[2] 어느 편의 말이 맞는지를 수치적 데이터를 가지고 실증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의 관심은 인간 정신의 자유를 고찰함으로써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헤겔의 자유 개념은 복지제도의 확충과 상반되는 쪽으로 논리적 귀결을 이룰 수도 있다. 물론 헤겔의 국가 개념이 복지 국가와 긍정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만, 개인의 책임과 사회 구조의 책임 간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복지 논쟁에서는, 헤겔의 자유 개념이 복지국가 담론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이런 논리전개이다. 아무리 집안이 어렵고 공부의 기회가 남들보다 협소할지라도, 한국사회가 전근대적인 신분사회가 아닌 이상 꿈을 이룰 가능성은 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에도 자수성가하여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수성가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부모로부터 상속한 재산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IT산업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여 신흥 부자의 대열에 낀 인재들도 있다. 상황과 환경을 탓하지 말고 인간 정신의 고귀한 자유의지적 결단으로 꿈을 위해 나아가라. 치솟는 대학 등록금에 좌절하지 말고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여, 설령 휴학을 많이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목표한 꿈을 위해 졸업을 포기하지 말라. 한국사회에서의 계층상승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단지 어려울 뿐이다. 그말인즉 개인의 노력 여하(자유의지에 의한)에 따라 기회는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 이동의 수월성과 사회 통합을 이유로 세금을 고등교육과 공공의료 및 실업보험에 쏟아 넣는 것은, 인간을 의존적으로 만들 수 있다. 고로 보편복지 담론은 인간 자유의 훼손과 이웃해있다.

 

           헤겔이 자유가 외화한다는 개념을 통해 자유를 객관적인 실재의 영역에서 견고히 한 것은 매우 유의미하다. 사변적 관념 철학이라고 헤겔을 공격하기에는 그가 고민했던 자유의 개념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자유의 개념이 구조와 개인 간의 관계를 간과할 수 있다는 측면은 문제가 있다. 구조와 환경의 희생자에게 도덕적 부채까지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자유 개념을 토대로 만들어진 사회는 인간적인 사회인가? 인간이 가진 절대적 자유라는 개념을 양보하고서라도, 정신 외부의 여러 조건들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연약한 인간 정신을 상정하는 철학적 주장을 제도와 문화로 구체화시킨 사회가 외려 더 행복한 사회이지는 않을까? 인간 개별자에게 도덕적 부채와 물질적 간난의 짐을 덜어주는 따뜻한 철학은 절대적 자유의지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닌 존엄성, 즉 외부의 사회적,자연적 법칙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며 영위해 나가는 존재적 고귀함을 철학적으로 주장하기 위한 강력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자유를 부정하는 정반대의 철학적 논의를 살펴보자. 인간 정신이 정신 외부의 심리적, 경제적, 역사적, 사회문화적 요소들에 의해 규정될 수 있다는 철학적 주장은, 그것이 현실 변혁의 무기로 벼리어 사용될 수 있고 그로 인해 해방적 성격을 띠기가 쉽지만, 그것의 논리적 귀결은 외려 인간 자유의지의 부정으로 치닫는다. 그 철학을 고안한 사람들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자유의 개념을 어떻게든 끼워 넣으려 여러 철학적 장치들을 고안했지만 그것은 그들 철학 전체의 일관성과 대립하는 사족이다. 원자론적 결정론이든, 역사적 결정론이든, 어떤 철학이 결정론의 강력한 경향을 띠고 있을 때 인간 자유와 그에 기반한 인간 존엄성은 철학적으로 질식한다.

 

그렇다면 정신 외부의 대상(물질)에 의해 강제되고 규정될 수 있는 연약한 인간 정신과, 그러한 절대적 자유의지의 포기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할 수 있는 철학적 돌파구는 무엇인가. 기독교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창조 상태와 타락 상태의 대비를 통해 이 두 가지 – 인간 정신의 비()자유적 속성과 인간의 존엄성 – 를 동시에 옹호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어떻게 철학적 논의가 될 수 있겠냐는, 그것은 종교적 논의이지 않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유의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철학과 종교 모두 그 시작의 성격이 같다. 종교비판을 시행했던 포이어바흐는 자연이 세계의 근원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과학적, 실증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아닌 철학적 가정이다. 실제로 포이어바흐는 그의 저서 <<종교의 본질에 관한 강의>>에서 ‘자연은 파생된 것이 아닌 주어져 있는 진리’라고 표명했다.[3] ‘주어진’ 진리. ‘도그마’라는 어휘는 교회사 속에서 외적 권위로부터 ‘주어진’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포이어바흐도 ‘주어진’ 자연이라는 ‘도그마’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 철학의 공리적 출발점과 종교적 논의의 출발점 모두 ‘도그마’라는 형식, 곧 부여된 어떤 것이라는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모든 철학이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철학사상들을 하나하나 조사해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포이어바흐의 사상이 종교가 아닌 철학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면, 기독교의 요소를 이용한 논의 또한 철학적 논의라고 간주될 수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 규정에 관한 것이라면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애초에 선한 존재였다고 한다. 여기서 선함이란 도덕적 악과 물리적 악의 부재를 뜻한다. 도덕적 악의 부재란 신과의 조화된 상태를 가리킨다. 물리적 악의 부재란 죽음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런 타락 이전의 상태에서 인간 정신은 외적 조건에 규정되지 않는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타락의 길은 인간 전존재의 부서짐을 초래했다. 신과 인간의 대립으로 인한 종교문제, 인간과 자연의 대립으로 인한 환경문제, 인간과 인간의 대립으로 인한 사회문제, 인간 스스로의 내적 대립으로 인한 심리적 문제들이 타락의 결과들이다. 이러한 전적 타락(전적 타락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범위의 문제이다)은 인간이 정신 외부의 조건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한 스스로의 자유의지적 결단을 내리는 상황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여기서 인간의 선택들은 자발성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은 인간이 우연하게 조우한 외부에 의해 규정된 선택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인간의 자유의지는 이전에 존재했으나(타락 이전) 현재는 없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비슷한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만약 자유의지에 둔다면, 인간 본래의 모습(타락 이전)에 녹아 있는 절대적 자유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을 반드시 자유의지에서만 찾아야 하느냐는 의문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것은 논의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런데 현존하지 않는 자유가, 과거에만 있던 자유가 어떻게 현재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자유에 인간 존엄성의 기반을 설정하는 기존의 논리를 따라가보자. 영유아의 경우 현재상태에서 인간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 시점에서 인간 기능의 온전한 발현을 기대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장애아의 경우 인간 본질의 온전한 실현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자유에 근거한 인간 존엄성 주장은 반드시 현재 시점에서의 혹은 미래 시점에서의 자유 보유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유적으로 지닌 본성에 대한 고찰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적 본성이 애초에 선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면, 현재 자유를 상실한 상태가 인간 존엄성의 주장을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것은 시점의 문제가 아닌 유적 본성의 문제이다.

 

어떤 인간 규정이 맞는지 실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 우리 사회에서의 행복 증진을 위해 더 적절한 규정을 역으로 찾아갈 수는 있다. 각각의 인간 규정이 발생시키는 사회적 결과들로부터 최적의 규정을 역추적하는 것이다. 물론 무엇이 행복인가,하는 문제가 또 남는다. 만약 행복을 ‘개별 인간의 개성을 공동체 안에서 발현시키는 상태’로 정의한다면, 사회성원이 최소 복지의 제도 안에서 난처한 정도의 생활을 영위하는 곳이 아닌, 존중받는 사회성원으로서 미시적, 거시적 공동체에 여유롭게 참여하고, 정신적, 육체적 발달을 물질적 가난 때문에 박탈당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행복한 사회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보편적 복지에 근거한 복지국가이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정신 외부의 조건에 의해 강제당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절대적 자유의 존재론적 기억을 간직한 존엄한 존재라는 기독 유물론의 인간관은 복지국가 형성에 적절한 철학적 토대가 될 것이다.



[1] ≪중앙일보≫ (2010.7.8.).

[2] 장하준, 쾌도난마 한국경제, (부키) 154p

[3] 안현수, 인간적 유물론, (서광사) 5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