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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1년]맑스의 물신숭배(fetishism) 개념과 소외 그리고 대안

원래 물신숭배라는 용어는 원시 종교의 한 형태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자연적 사물에 초자연적 힘이 서려 있다고 믿고 그 사물을 숭배하는 것이 물신숭배라는 어휘의 용법이었다. 이것을 맑스가 거대한 상품 집적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새로운 기호로 전환시킨다. 상품에 녹아 있는 노동의 의미를 제거하고 노동에 담겨 있던 사회적 관계만을 추출하여 상품 고유의 특성으로 위조하는 것이 물신숭배이다. 상품이 담지한 노동은 상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추상화된 일반 노동을 뜻한다. 노동의 질적 요소를 소거하고 노동 시간이라는 양적 요소를 척도로 하여 상호적으로 비교 가능한 상품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비교 가능한 세계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상품 가치를 구성하는 추상화된 일반 노동은 사회적이다.

 

노동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이 교환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일반 노동이 비교 가능한 척도를 마련해주기 때문에 비교를 통한 교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교환 과정에 참여하는 인간은, 그러한 교환을 가능케 해준 일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간과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감각적인 행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상품이 교환되는 와중에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규정짓는 일반 노동을 보지 못하고, 교환을 일반 노동의 산물인 물적 대상들간의 사회적 관계로 여기게 된다. 이것은 오감으로 인지하는 감각 영역에서 발생하는 교환과정의 본질적 역학 관계를 고려하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한 착시와 오인이다. 따라서 생산자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생산물 간의 사회적 관계로 호도하는 것이 물신숭배의 출발이다.

 

물신숭배 발생의 가까운 원인은 오인과 착각이지만 궁극적 원인은 교환을 위해 인간 노동을 추상화하여 일반 노동으로 만드는 상품세계 자체에 내재해 있다. 판매를 목적으로 만든 물적 재화와 서비스가 상품이다. 팔려면 교환의 척도가 필요하고, 그 교환의 척도로서 추상화된 인간 노동이 요청된다. 이 일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교환을 매개로 표출되는데 일반 노동의 손에 잡히지 않는 초감각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으로 인해 노동의 의미는 증발되고 물적 대상들만 남는다. 그리하여 노동의 산출물들이 노동 없이 스스로 가치(교환가치)를 지녔다고 천명하는 물신숭배의 시대가 도래한다. 환언하면 교환을 위해(판매를 위해) 상품이 필연적으로 지녀야 하는 교환 척도로서의 일반 노동적 성격이, 그 자신 특유의 추상성 때문에 스스로를 무화하고 감각적 물질 대상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위에서는 물신숭배에 관한 서술을 도덕적 차원이 아닌 기술적 차원에서 했다. 물신숭배를 도덕적 차원에서 비춰볼 때 드러나는 현상이 바로 소외이다. 상품 가치의 근원인 일반 노동에서 탈구된 채 자존적 가치를 지녔다 여겨지는 상품들의 세계에서 인간성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매우 협소하다. 노동이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 상품이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이 가치를 지닌 상품은 자본주의 성원들에 의해 추구된다. 이런 사회에서 상품을 제외한 모든 것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편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상품의 현상형태인 화폐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의 편성이 조정된다. 이렇듯 본래 수단이 아닌 것을 수단화 할 때 소외가 발생한다. 소외란 익숙해졌던 것으로부터의 낯설어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가치(화폐)를 통해서만 주요한 사회활동이 가능해지는 사회가 도래한다. 인간 관계가 물질 간의 관계를 매개하지 않고는 이어지지 않는 그런 사회인 것이다.

 

자기 증식하는 가치인 자본의 요구에 따라 20세기 자본주의는 테일러주의에 컨베이어벨트를 결합한 포드주의를 만들어냈다. 이 포드주의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인간의 생체 리듬을 늘리고 잘라내어 기계의 리듬에 맞춰 쑤셔넣었다. 인간 생명활동의 흐름과 주기가 상품 생산을 위해 소외되는 것이다.

 

포드주의의 단순반복 작업은 변동성이 아닌 일정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반복 노동에서의 변동 및 변화의 소멸은 생명활동을 하는 유기체가 지니는 역동과 변화의 과정을 부인함으로써 타나토스, 즉 죽음에의 충동과 결합된다. 이 타나토스적 노동이 생명으로부터의 소외를 결과한다.

 

포드주의가 내포하는 테일러주의적 요소, 즉 구상과 실행의 분리로부터 인간 주체성의 사멸이 초래된다. 노동의 전반적 기획이 기업 내의 엘리트 집단에 맡겨지고, 그 구상의 단순한 실행만을 노동자에게 요구하는 미국식의 “경쟁적 경영자 자본주의”[1]에서 노동자는 인간으로서의 능동적 힘을 발산하지 못하고 불구적 존재로 전락한다. 이것은 자율의 영역을 박탈당한 인간성의 소외와 잇닿아 있다.

 

생명활동의 양상, 생명 그 자체, 인간성, 이 세가지는 풍요를 얻기 위해 물신에게 봉헌한 자본주의 사회의 십일조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물신의 사제임을 증명하는 영광스러운 상흔으로 위의 삼중적 소외를 갖게 되었다. 다층적 소외를 대가로 치렀기에 상대방을 인간으로 대면할 요소가 극히 적게 남아 있다. 서로가 만나고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인간적 요소가 아니라 이제 물적 요소가 개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요소가 저기 물신의 성전에 바쳐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관계는 실상 상품간의, 화폐간의 관계로 대체된다. 그리고 화폐로 구성된 사회 관계망에 진입하기 위해 역시나 화폐를 필요로 한다.

 

화폐 관계망이 사회를 직조하는 것의 비윤리성을 더 말해 무엇하리. 그런데 비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비화폐적 관계망으로 사회를 구성한다고 해도, 여전히 사회에의 진입 장벽으로서의 조건들은 남아있지 않을까? 단지 그 조건이 화폐가 아닐 뿐이다. 화폐 이외의 조건이 우정과 환대의 공간에서 인정 받기 위한 것이 된다고 해서, 그 공동체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곳에도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자의 배제와 소외는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대안 사회를 섣불리 코뮌주의나 교회 공동체로 제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1] 경쟁적 경영자 자본주의와 협력적 경영자 자본주의의 구별은 Chandler(1990)에 의해 이루어졌다경영자 자본주의가 함몰될 수 있는 내부 담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따라 두 가지의 형태로 나뉜다경쟁적 자본주의는 생산물시장의 경쟁을 통해 내부자 담합을 규제하였다이러한 경쟁규율은 노동자 계급의 경영참여를 배제하는즉 구상과 실행을 분리하는 테일러주의로서의 거리두기 노사관계를 형성했다반면 협력적 경영자 자본주의는 은행과 기업 간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노사관계에까지 확장해 참여적인 노사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고임금,고숙련에 기반한 품질다변화 생산체제를 달성했다. (조영철미국식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적 대안(당대,2001),P.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