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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3년]베를린 리포트

영화 베를린은 (수작임에 분명하다) 독일에 대해 내가 갖고있던 판타지를 여지없이 깨버렸다. 코미디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영화가 독일인을 그토록 얼빵하고 어리버리하게 그릴수 있겠는가. 한국영화이기에 가능한 패기다.

독일이 어떤 나라던가.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이 <수레바퀴 아래에서> <황야의 이리>를 기다리는 문학의 나라, 낭만의 나라이다. 그뿐이랴.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서린 춤사위 위에서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이 <비극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지성의 나라이다. 근대철학의 절정에 눈동자를 찍어올린 칸트와 헤겔의 나라, 철인의 나라이다. 비록 한때 나치즘이 발흥했지만, 나치즘으로 표상되는 근대의 야만성을 철학적 투쟁으로 분쇄시킨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이 있어 또한 아름다운 나라이다.

느슨하게 얽어맨 넥타이 사이로 슈바빙의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며 학문과 예술을 논할법한 나라

영화 베를린에서 독일인은 남북한의 첩보 공작 와중에 허무하게 소모되고 지리멸렬하는 음탕하고 탐욕스런 돼지들로 묘사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