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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0년]한국 개신교의 국가주의 성향에 대한 역사적 고찰

한국 개신교의 국가주의 성향에 대한 역사적 고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교회인 광화문 새문안교회는 매 달 한번씩 주일예배 마지막에 애국가가 울린다. 종교 예식에 뒤이어 애국가를 제창하는 것은 퍽 기묘한 조합인 듯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종교와 국가 간 친밀성은 신학적,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근친성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한국 개신교와 국가 간의 밀접한 관련성은 곧잘 국가주의적 극우파와의 정치적 밀월을 감행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국가주의는 국익이라는 대의 아래 인류 보편적 가치를 복속시키고 편리하게 수탈 가능한 수단으로 격하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화와 인권을 아무런 심정적 불편과 동요 없이 짓밟았던 군부독재는 군부가 유통시킨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고 이성의 논리를 사멸당한 한국 민중의 암묵적 지지 아래 자행되었다. 놀라운 점은 어느 집단보다 도덕에 예민해야 할 종교집단인 개신교 교회가 80년대까지 납득할 수 없는 침묵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좌파 정권이 집권했던 지난 10년 간 보수 교회는 침묵을 깨고 극우이념의 대중화 및 선전의 산파가 되기를 자처했다. 극우적 집회,시위에는 한기총의 지도 목회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성도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이 글에서 교회의 극우적 면모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이 아닌 가이사에게 갖다바치는 국가주의와 개신교회의 야합을 추적하고자 한다. 교회의 국가주의 성향은 한국 보수 교회가 최초로 투신한 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를 통해 설명된다. 우선 한국 교회가 반공주의와 접속된 역사를 살펴보자. 19세기 한국 기독교는 사회문화적 전위로서의 기능을 매우 성실히 수행했다. 반상차별반대, 축첩제철폐, 조혼금지, 민주적 장로선출, 민족의식 고취 등 정신적 근대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반봉건, 민족주의흐름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던 것이 한국 교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방가르드로서의 패기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통과하면서 상당 부분 희석된다. 그리고 그 때를 기점으로 탈정치적, 비정치적 성향의 내세 위주, 감성 위주의 개신교로 변질된다. 감정의 폭발을 매개로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모티프 삼는 여러 개별적 부흥회가 평양의 대부흥으로 결집되었다. 이 부흥의 열기 속에서 일제의 마수가 드리운 암담함이 주는 고통을 경감시키고자, 민중들은 탈현세적인 변화산의 피난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일례로 길선주 목사는 일제를 향한 민족적 분노를 회개하라고 설교하기까지 했다니, 비참한 민중의 현실을 냉철한 신앙으로 바라보고 가슴으로 아파하는 현실 참여의 맥박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구한말의 전근대적 구조 악과 싸우던 기독교는 종교 감흥적 위안을 방패로 점차 20세기 초부터 체제순응적이고 국가 권세에 무비판적인 집단으로 변태했다. 이것은 곧바로 치열한 현실인식의 결여를 동반했으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문제의식과 민중 지향적 사회 인식의 거세를 초래했다. 이러한 기독교의 이념적 배경은 해방 직후 북쪽에서 사회주의 개혁을 실행하려던 사회주의 세력과 마찰을 빚는 빌미가 된다. 실제로 중소지주와 중소상공인을 기반으로 했던 개신교계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주의화의 큰 피해자에 속했다.[1] 휘몰아치는 토지개혁의 와중에도 자신들의 유산계급적 이익을 버릴 수 없었던 북한 교회는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남한으로의 탈출을 시도했다.이런 맥락에서 6.25전쟁으로 공고화된 기독교 반공주의의 시발은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적 개혁 공세에 타격을 입은 것에서부터였다고 인식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마르크스도 사적 이해에 대한 종교의 집착을 풍자적으로 지적하지 않았던가. “영국 국교회는 자신들의 신앙 39개조 가운데 38개조에 대한 공격을 용인할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화폐 수입 1/39에 대한 공격은 용인하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무신론까지도 전통적 소유관계에 대한 비판에 비하면 차라리 더 가벼운 죄에 해당한다.”[2]라고 말이다.

공산주의로부터 당한 사적 이익의 침해로 형성된 뿌리깊은 반감의 화신인 반공주의가 국가주의를 요청한 것은,어쩌면 필연적 절차였다. 반공주의가 총부리를 겨눈 궁극적 대상은 국내의 “빨갱이”들이 아니었다. 그 빨갱이들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외부의 적, 북한이라는 국가였다. 즉 궤멸과 파멸의 최종 목표는 국내가 아닌 국외의 국가적 실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산 국가를 부수기 위한 망치로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반공주의의 신앙화를 결심한 교회집단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게다가 평양 대부흥 이후 형성된 체제 순응적 신앙은 그 망치를 주체적으로 이용하기 보다 그 앞에 엎드려 복속되기를 선택하도록 규정력을 발휘했다. 물론 한국 교회의 체제 순응이란 어디까지나 그들의 사적 이해가 침해 받지 않는 한도에서 유효한 이야기다. 결국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자기 이념의 현실태를 위해 북한의 파멸을 욕망했고 그 수단인 남한이라는 국가 조직에 하나님의 형상을 제물로 올려놓는 국가주의로의 노정을 시작한 것이다.또한 주변적 논의이긴 하나 반공의 구체적 실현-북한 붕괴-에 대한 욕구가 용미가 아닌 비이성적 친미로 방향타를 잡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타계적이었으나 결코 철저히 타계적이지 못했던 20세기 초반의 한국교회. 그래서 사회주의 개혁이 몰고 온 사적 이익의 위기 앞에서 비합리적 방어기제를 작동시켜야만 했던 한국교회. 이로 인해 지난 세기 역사의 수레바퀴를 맹목적으로 굴려갔던 집단초자아적 반공주의의 유모역할을 감당한 한국교회. 이 반공주의의 교회 에고(ego)적 실천이 택한 국가숭배, 국가주의. 기독교 국가주의는 로고스 없이 종교적 파토스에 심취했던 절름발이 한국 개신교회가 탄생시킨 역사의 괴물이었던 것이다.



[1] 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류대영 220p

[2] 자본론 제1판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