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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0년]신자유주의 비판 : 성서의 빛 아래서

 

 

 

 

 

 

목차

 

I.             서론

 

II.            

 

 

1.    해석학적 작업

 

(1)        예표론(모형론)적 석의의 한계와 그것이 시사하는 바

 

(2)        신구약 사이의 불연속성

 

(3)        구약의 사회경제 관계에 대한 규범은 신정일치 사회에만 해당하는 원리인가

 

(4)        신약의 윤리는 제도적 차원에서 교회 바깥에 적용될 수 있는가 - 재세례파 비판을 중심으로

 

2.    신자유주의의 형이상학적 검토

 

(1)        신자유주의의 기원  정치적 자유주의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2)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특징 및 비판

 

a)   경제적 인간

 

b)   소유와 정의

 

c)   시장과 국가개입

 

3.    신자유주의의 업적 검토

 

(1)        신자유주의 정책의 성격

 

(2)        신자유주의의 결과

 

 

III.         결론

 

 



 

 

I.             서론

 

본고는 성장과 분배에 관한 한 관점인 신자유주의를 성서의 빛 아래서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서가 발하는 계시의 광채를 현재 우리 삶의 지평과 지축을 격렬하게 흔들어대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물에 던진다면, 복잡한 현실의 외피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것의 본질이 우리 앞에 풀어지리라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는 90년대초 자본시장 개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2년 1월 3일 국민주를 제외한 모든 상장 종목에 대해 1인당 3퍼센트, 종목당 10퍼센트 한도에서 외국인 투자를 허용함으로써 한국 주식시장은 개방시대를 맞았다. 그후 1998년 5월 25일 외국인 주식투자와 관련한 모든 제한이 사라졌다.[1] 또한 1993년 금융 시장 개방 이후 무리한 단기외채 차입을 통한 대기업의 중복 과잉 투자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자본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탈규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97년 IMF의 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촉발시켰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더욱 충실해지는 역설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김대중 정권이 IMF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정신은 정책적으로 훨씬 구체화 되었으며, 노무현 정권은 한미 FTA의 체결로 이것을 공고화시켰다. 이제 이명박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최정점에 서서 G20 정상회의, 한미 FTA의 의회 비준 그리고 의료법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 보수와 진보 정권을 관통하며 정책적 발전과 일관성을 견지해온 신자유주의는 그러나 그 확대 일로 속에서 크고 작은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2007년 이랜드 사태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논의 없이 노동의 수량적 유연성에 집착하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이 심화시킨 고용의 불안정성과 질 저하가, 사회적 책임 의식이 결여된 기업의 행태와 결합되며 울린 파열음이었다. 2008년의 촛불시위는 신자유주의의 세례 아래에서 자유무역를 향해 빗나간 신앙을 키워온 한미FTA 추진 세력과, 농민들의 생존권 및 행복권 그리고 의료 공공성 보장을 외쳤던 시민들 사이의 충돌이 빚어낸 시국이었다. 급기야 시장의 자기 치유력을 확신하며 금융 규제 완화와 정부 개입의 축소를 주장해왔던 금융자본주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앞에서 의회의 구제금융에 구걸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어서 각국의 구제 금융을 위한 지출 확대는 심각한 재정 적자를 초래했다. 평소에 재정 건정성이 좋지 않았던 그리스는 확대된 재정 지출을 상쇄할 세입원인 관광업과 해운업마저 금융위기의 여파로 그 수익이 감소하자 결국 부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재정 위기를 겪어야 했다. 이 사례들은 지난 수십년간 대내외적으로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이 근래에 높은 빈도와 강도로 표출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를 탐색해나가려는 출발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 자신 역시 구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구조는 감각 세계에서 인식할 수 있는 현상들의 다양한 양태를 규정하는 패턴이나 규칙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조는 무언가를 강제하고 정한다는 의미에서 권세이자 권위이다. 특정 구조에 특정 요소를 투입하면 그 구조가 지향하는 결과가 산출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을 사회경제적, 심리적 구조의 결과물일 뿐으로 간주하는 결정론적 시각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을 해치므로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심리적이든 사회경제적이든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권세, 즉 구조를 무시한 채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고자 기대하는 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구조에 대해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만물 가운데는 왕권, 주권, 권세가 포함된다.(골1:15-17) 그리스도를 섬기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선한 목적으로 창조된 권세[2]는 죄의 영향으로 타락한다. 권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으려 시도하며(롬8:38) 믿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대항체로서의 삶의 패턴 가운데 예속시킨다.(엡2:2) 이러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권세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일정 부분 기여를 한다.(롬13:1) 그러나 전체적으로 성경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구조에 사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함을 암시한다. 이 세대에 존재하는 뒤틀린 패턴을 인식하고, 죄 된 그것이 아닌 하나님의 패턴에 순종하라는 것이다.(롬12:2) 실제로 예수가 선포한 메시지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임을 고려해볼 때, 이미 세속 정부가 들어서 있는 이스라엘 공간에서 정치적 용어인‘나라를 선택한 것부터가 이 세상 나라에 궁극적 구원의 희망이 있을 수 없음을 선포하며 동시에 구원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마귀적 요소를 비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배태한 경제 구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삶을 강제하는 물적 논리인 신자유주의의 권세를 몇몇 성경구절을 끌어들여 간단하게 제압할 일만 남았는가? 아쉽지만 그곳에 이르려면 해석학의 몇몇 다리를 지나야 한다. 성경적 원리가 사회경제적 제도에 적용된 귀중한 예는 구약에 있다. 그러나 구약을 신약 교회의 예표로만 본다면, 구약에 드러나 사회경제적 언술은 교회 내의 코이노니아로 환원될 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예표인 구약의 원리를 교회가 아닌 세속 정부에 적용하고 그것을 평가하는 준거 틀로 사용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부당하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설령 예표론적 해석 이외의 해석방식도 타당하다 할지라도,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경제적 관계를 규정하였던 율법은 신정일치 사회에 주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와 세속 정부로 이원화된 사회에서 율법에 녹아있는 원리가 교회 밖의 시민 사회 차원에서는 적실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신약의 윤리는 구약의 윤리보다  물론 이 두 개를 뚜렷이 구분함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적용에 있어서 장애물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약 윤리의 적용 방식은 제도 비판이나 변혁이 아닌 교회 자체의 존재만으로 -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는 명제로 표현되는 - 족하다는 논리도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난기류를 형성하는 신학자는 메노나이트 계열의 존 하워드 요더이다.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김두식도“예수님은 로마 제국을 향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로마제국을 향해 그런 요구를 하라고 교회에 가르치신 적도 없습니다”[3]라는 말로 메노나이트적인 성경 해석과 적용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기독교인의 세계형성적 활동은 교회 본질에 위배되는 적대적 행동이 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할 때 보인 독일 교회의 치명적 침묵은 십자군과 종교재판에 버금가는 역사적(historical) 기독교의 역사적(historic) 오류였다. 반면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 이야기는 교회를 통해 제도와 정책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제도 및 정책을 성경적 잣대로 분석하고 비판하기 전에, 논란이 되는 해석학적 기반을 정리하고 견고히 하는 작업의 선행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게 된다. 논리적 건축물의 토대가 허술할 경우, 아무리 신학적 검토의 내적 논리가 치밀하고 일관된다 할지라도 그 구조물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우선 구약 윤리와 신약 윤리에 관한 해석학적 합의를 도출한 후, 그렇게 만들어진 신학적 틀을 사용해 신자유주의의 철학과 그것의 업적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II.          

 

1.    해석학적 작업

 

(1) 예표론(모형론)적 석의의 한계와 그것이 시사하는 바

 

구약이 현대 사회 윤리에 적실성을 갖지 않는다는 주장은 예표론(모형론typology)적 해석 방식만을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맥락에서 나온다. 예표론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의 예시를 찾는데 중점을 둔다. 예표(모형type)들은 구약에서 신약의 구원사에 있는 대형(antitype)들에 대한 하나님이 세우신 모델들 또는 예비적 제시들로 간주되는 인물, 제도, 사건들이다.[4] 신중하게만 사용된다면 예표론은 구약을 해석하는 유용한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해석 노선은 아니다. 그 이유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 성경에서 모형을 사용하는 방식은 구원사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와 구약 간에만 사용되지 않았다.“바울은 이스라엘 역사의 사건들을 우리를 위한‘경고’나 '본보기’라고 말한다.(고전10:6,11) 소돔과 고모라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전형이 되었다. 다윗은 이상적인 왕의 모본으로,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의 본으로(창15:6), 모세는 본이 되는 선지자로(신18:15,18) 기록되었다.”[5] 이렇게 볼 때‘모형’은 성경 속에서 여러 개념 간의 다양한 상응 관계를 보여주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예표론적인 모형 용도만이 배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 가령 희년이라는 경제 제도를 메시아적 구속사역의 모형뿐만 아니라, 현대 경제의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는데 유용한 모형으로도 간주할 수 있겠다.

           둘째, 원형이 모형과 모든 속성에 있어서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예표론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발터 아이히로트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두 실체 사이에서 중요한 몇몇 유비들만을 토대로 논증이 펼쳐진다. 그 밖의 다른 속성들은 전혀 딴판일 수 있고 여기서 고려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3:7 이하에 나오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병행에 있어서 관심의 대상은 모세의 삶과 섬김의 모든 세부적인 내용들이 아니라 전자의 구절에서는 그의‘디아코니아’(섬김)와‘독사’(영광), 후자의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경륜)속에서 하나님 백성의 지도자이자 중보자로서의 그의 충성이다”[6] 이는 구약에서 구속사로서의 그리스도의 속성과 관련되지 않은 항목들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표론적 해석 틀이 잡아내지 못하는 신학적 의미들이 구약에 다수 포진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일례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정의로운 경제 구조에 대해 구약이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실제로 시편2편, 이사야 42장, 창세기22장을 읽어보면, 예수와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우리가 캐내야 할 깊은 (신학적) 진리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7]

           셋째, 구약의 제도, 인물, 사건이 모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에 신학적 의의가 이미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시되어 선재하는 신학적 의의는, 하나님이 구원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소들을 예비적으로 제시하셨다는 예표적 의미와 연결되어 한층 더 풍성한 의미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한 예로 역사적인 구원행위였던 출애굽이 함의한 사회경제적,영적 해방으로서의 의의는, 바벨론 포로 귀환과 메시아의 구속 사역에 접목되어 매순간마다 발전된 신학적 의미를 창출했다. 결국 구약에 역사적 실체가 존재하고 그것이 신약의 실체와 상응하며 충만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다는 면에서 구약이 신약의 그림자이자 모형이라는 말이지, 신약에 명시적으로 나타난 사건들과의 연관 속에서만 의미를 드러내는 구약이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을 신학적 의의가 이미 부여되어 있는 실체로서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약을 고유의 실체 없는, 신약의 그림자 집합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오염된 관점일 뿐이다.

           이처럼 예표론은 구약에 대한 단일한 석의 방식이 아니다. 예표론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본문만을 선별적으로 사용한다. 또한 선택된 본문 내에서도 구속사적 측면에서의 그리스도와 상응할 수 있는 몇몇 유비들만을 해석의 주요 논거로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구약성경 전체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쓰였다고 선포(딤후3:16-17)하고 있다. 따라서 예표론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건전한 해석학적 자세이다. 만약 예표론이 무리하게 구약의 모든 세부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려 한다면 성경 해석의 왜곡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 신구약 사이의 불연속성

 

구속사적 접근만을 허용하는 예표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구약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예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회경제적 관계의 모형을 추출하는 작업을 가능하게 한다. 즉 이스라엘은 교회의 예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국가 및 사회에 대한 모형으로서 현대 사회에 강렬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8]

그러나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계시의 점진적 발전성이라는 틀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의 불연속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약 불연속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구약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려 한다면 신율주의(theonomism)에 빠지게 된다. 신율주의는 신구약 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양식의 불연속성을 외면하는 오류를 범했다. 신율주의자들은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시민법이 신약에 의해 금지되지 않는 한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도덕법과 시민법 사이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으며 율법 전부를 문자적으로 현대 사회에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는 모세 오경의 형식 규정 사항이 사라진다. 예수께서는 레위적 음식 구분법을 무시하셨으며(막7:1-23) 베드로 또한 고넬료와의 만남 직전에 부정한 짐승에 대한 구분이 무너짐을 환상으로 목도한다(행10:1-16). 구약의 시민법은 간음한 여인을 돌려보낸 예수로 인해 그 힘을 잃었다(요8:1-11) 구약에서 사형에 해당하던 죄목들은 신약의 교회에서 출교로 심판된다. 신율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모세로서 구약의 율법을 새로운 구속사적 전환속에서 수정하고 있으며, 몇몇 경우에 있어서 모세의 법을 폐기시키고 있음을 오히려 보여”[9]주는 것이다.

 

(3) 구약의 사회경제 관계에 대한 규범은 신정일치 사회에만 해당하는 원리인가

 

II-1-(1)에서는 구약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예표로 바라보는 예표론이 구약에 대한 유일한 해석 방식이 아니란 것을 증명함으로써 구약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풍부한 사회경제적 함의를 탐색할 수 있는 신학적 합법성을 마련했다. 이어서1-2)에서는 그러한 작업이 자칫 간과할 수 있는 신구약 간의 불연속성을 지적함으로써 신율주의의 오류에 접근하는 경로를 차단하였다. 하지만 구약의 사회 윤리를 현대에 적용하기 위해 건너야 할 다리는 아직도 남아있다. 구약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원리를 발견했을지라도 그것을 적용하기에는 현대 세속 국가와 고대 이스라엘 사이의 간격이 커보이기만 한다. 후자는 신정일치 국가로 전자의 운영 원리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 성격의 차이는 두 국가를 꿰뚫을 수 있는 도덕 원리의 연속성을 담보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가?

           구약의 권위는 예수께서 친히 인증하셨다.(마5:17-20) 또한 바울도 구약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며 윤리적 교훈의 모본이 된다고 기록하였다.(딤후3:16-17;고전10:1-13) 그런데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으로 나누는 기존의 방식은 구약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는데 제약을 가할 수 있다. 시민법과 의식법에 대한 외적 준수가 신약의 성도들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이는 매우 합당하다) 우리가 귀 기울이고 삶에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도덕법의 범위로만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가축에 관한 시민법(신25:4)을 인용하여 사도의 연보를 거둘 권리를 옹호하였다.(고전9:8-10) 도덕법 이외의 율법에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도덕성을 잡아낼 수 있는 것이다.  

칼빈도 구약을 해석하는데 동일한 방식을 취한다. 그는 안식일에 관해 해설하면서 그것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되었기 때문에“날짜를 지키는 미신적 행위를 그리스도인들은 삼가야 한다”[10]고 말한다. 그러나 안식일의 외적 준수 밑에 깔린 두 가지 신학적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교회가 자체적으로 정한 날에 모여 예배하는 것과(행2:42) 종들과 일꾼들을 쉬게 해주는 사회경제적 측면이다.[11] 그는 안식일 계명에 드러나는 두 가지 신학적 의미를“고대의 그림자에 속하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매 시대마다 똑같이 적용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12]고 주장한다. 칼빈은“이 두 가지가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13]라고 독자들에게 묻는다.

           따라서 필자는 율법의 삼분법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을 긋고자 한다.(도표1 참조)

 

 

 

이로써 기존의 삼분법을 긍정하면서도, 하나님의 통치 양식의 차이와 하나님의 성품에 기반한 보편적 도덕 원리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도덕법은 그것 자체로 가감 없이 이 세대에 적용할 수 있으나 시민법과 의식법은 경륜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차이가 발생시킨 문화적 표현을 해독하는 것이 필요하다. 심원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 위에 입혀진 가변적인 경륜 및 문화를 현시대에 맞게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는 것이다.[14]

           위와 같이 율법을 두 개의 층(level)으로 나누는 방식은 신정일치 국가라는 외형적인 통치 양상과 하나님의 불변하는 도덕 원리를 구별하게 해준다. 성도들의 정치적 삶이 신정국가에서 교회와 공존하는 세속국가로 전환된 것은 성경에서 긍정되었다.(롬13장) 하나님의 백성들(그림의 좌변)이 마주하게 되는 사회경제적 양상(우변)은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다.(도표2 참조)

 

 

           이스라엘은 교회의 예표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사회, 국가의 모형이었다. 그러나 그 모형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도덕 원리를 머금은 채 변화하는 역사의 무대에 따라 자유로이 모습을 바꾸었다.[15]그러므로 신정국가인 고대 이스라엘에 주어졌던 사회경제적 함의를 담지한 율법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 이야기하고 있다.‘신정일치’에서‘세속’으로의 국가 양식의 변화가, 그것들이 기반해야 할 사회 윤리적 원리까지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바깥의 국가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원리에서 탈주하여 불법을 자행하는 것을 맹렬하게 비판한다.(암1:3-15;욘1:2;나훔서 전체) 소돔과 고모라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외면한 사회 경제적 죄악으로 인해 멸망 당했다.(겔16:49) 의와 공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창18:19)은 열방을 향한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시82:8)

 

(4) 신약의 윤리는 제도적 차원에서 교회 바깥에 적용될 수 있는가 - 재세례파 비판을 중심으로

 

성경의 윤리를 제도적으로 적용시키는데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재세례파의(그 중에서도 서론에서 잠깐 언급했던 메노나이트의) 신학적 오류를 살펴보면 오히려 제도 비판을 위한 우리의 신학적 전제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재세례파의 지도적 원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절대 우위성이다.[16]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을 대체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절대 우위성이다. 예수와 신약 성경을 최우선시함으로써 구약 성경을 결정적으로 부차적인 것이 되게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시민 생활과 정치에 대한 구약 성경의 권위를 배격하거나 최소한 상대화하는 효과를 갖게 되었다.[17] 이로써 재세례파는 구약의 사회 경제적 함의를 세속사회에 접목시킬 동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한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과도 단절됨으로써 열방의 사회구조적 타락을 향해 소리치셨던 하나님의 선지자적 공세에 무감각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요더는“교회는 권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이는 이미 예수가 하신 일이다. 교회는 그들에게 유혹을 받지 않으려고 주의한다”[18]는 벌코프의 말을 인용하며 기존 사회를 변혁해 나가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열정을 외면한 것이다.[19] 단지 교회의 교회됨이라는 표어[20] 아래에서 대안사회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이 사회를 서서히 바꿔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제도 비판과 제도 개혁을 위한 교회의 시도를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예표론만이 구약에 대해 유효한 해석이 아니며 따라서“구약 자체가 구약을 해석하기 위한 몇몇 의제를 설정하도록 하는 것이 더 적합”[21]함을 앞에서( II-1-(2) ) 살펴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이 계시하고 있는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사회 경제적 원리 찾아낼 수 있다. 비록 그 원리가 신정일치 사회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가변적인 문화의 차이로서 상대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사회 경제적 규범들은 현대에 적합한 형태로 번역되어 적용 가능해진다.( II-1-(3) ) 이러한 토대 위에서는, 재세례파의 사회 변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신 예수와(마5:17-20) 구약의 유익을 적극적으로 선포한 바울(딤후3:16-17)을 좇아 필자는 시편24편1절의 말씀(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을 교회의 사회 변혁 활동을 위한 공리적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마5:13,14)과 세상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마5:16)은 교회의 세계 형성적 활동을 지지한다. 여기서 빛과 소금, 그리고 선행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데 시편24편1절의 말씀이 유효하다. 온 세상, 곧 사회 구조와 제도마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으므로, 자선과 사회봉사뿐만 아니라 구조를 뜯어고치는 변혁적 활동도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 소금, 그리고 선행이 될 수 있다. 정경을 통전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신약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본질과 역할 속에서 우리는 사회경제적 구조 비판과 개혁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2.    신자유주의의 형이상학적 검토

 

(1) 신자유주의의 기원  정치적 자유주의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의 어휘적 구성은‘자유주의’에‘신’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새로운 자유주의라는 뜻일진대 그렇다면 자유주의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자유주의의 시작은 경제적 개념이 아닌 정치적 개념이었다.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로크는 자연법 사상에 근거하여 자연권과, 자연권에 관계된 국가의 역할을 규정하였다.[22] 인간의 자연권에는 신체의 자유, 종교적 신조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있다.[23] 국가는 이러한 자연권을 존중해야 하며 따라서 국가는 법에 의해 제한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명제 위에서 “자유주의는 아주 단순하게 합헌주의적 국가를 통한 개인의 정치적 자유 및 개인적 자유의 사법적 보호의 이론과 실천”[24]이다. 따라서 비록 자유주의가 국가 권력과 기능을 제한하며 정부로<부터의> 자유(소극적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국가의 크기가 자유주의적 국가의 본질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권의 존중이라는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수단으로 최소국가를 제창한다. 결국 자유주의 국가는 권리존중주의 국가(rights-based state)를 지향하면서 상황적 특수성에 따라 최소국가(minimal state)를 옹호할 수도, 배척할 수도 있는 것이다.[25]

적어도 초기 자유주의의 문맥에서 아담 스미스를 필두로 시작되는 자유방임적 야경국가에 대한 열렬한 옹호를 읽어낼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가 선한 정부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작은 정부의 논리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로크는 시민 정부의 목적으로 공공선의 보장을 이야기했다. 로크에게 공공선의 보장은 재산의 증식인데 재산(property)은 좁은 의미의 자산이 아니라 생명(life), 자유(liberty), 자산(estate)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이다.[26] 밀에게 있어서 좋은 정부의 조건도 정부의 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정부는 자기 발전(self-development)을 잘 촉진시키는 정부이다.[27]

또한 자유주의는 재산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28]을 주창하지도 않았다. 로마시대부터 18세기까지 소유는 분리될 수 없는 “생명, 자유, 그리고 재산’”을 의미했지 그것이“자본의 축적”은 고사하고 그 자체를 위한 소유, 혹은 무제한적 축적을 위한 소유를 의미하지는 않았다.[29] 따라서 로크의 시대에“소유한다”는 것은 매우 단순히 삶의 기회를 향상시킴을 의미했다. 소유권의 보장이라는 자유주의의 명제는 끝 없는 자본축적을 승인하는 것이 아닌, <보호>와 <안전>으로서의 재산을 지켜줌으로써 실존적 불안을 제거해주려는 시도였다.[30] 로크, 몽테스키외, 매디슨은 자유방임적 경제의 이론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자유주의는 법의 지배와 합헌적 국가를 의미했고, 자유는 정치적 자유를 의미했지 자유교환의 경제적 원칙, 더욱이 적자 생존의 법칙을 의미하지는 않았다.”[31] 로버트 노직이 로크의 자연권 개념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던 이유도 로크의 자연권이 적극적 자유를 요청할 수 있는 인류 전체의 보존이라는 관념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이다.[32]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왜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자유주의가 역사의 이중적 계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시민혁명으로서 우리가 지금껏 살펴봤던 자유주의를 정치 영역에서 제도화했다. 다른 하나는 산업혁명으로서 시장의 자율적 조정능력을 신뢰하는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의 이론을 현실 경제에서 구체화하였다.[33] 이 지점에서 자유주의는 개념의 분열을 요청한다. 절대왕정의 폭압을 견뎌낼 이데올로기적 원동력을 제공했던 자유주의에는‘정치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정치적 자유주의가 된다. 이 정치적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개념에 선행했다.[34] 정치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동일시 될 수 없는 별개의 개념인 것이다. 한편, 산업혁명 이후 줄기차게 제시된 생산과 분배의 효율성 및 소유권에 대한 깊은 관심도“시장의 자유”를 강력히 천명한다는 측면에서“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실은“경제적 자유주의”가 더 적합한 표현이다. 흔히“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가리키며, 특별히 부의 재분배와 경제적 기회 및 조건의 평등화를 모색하는 민주주의를 말할 때는“경제적 민주주의”라고 따로 지칭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적자가 신자유주의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초기 형태인 구자유주의와 최근 형태인 신자유주의 사이의 사상적 차이점을 선명하게 논하기는 어렵다.[35] 시기적으로 따지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구자유주의가 산업혁명부터 경제 대공황까지 사상적 수명을 유지했다면, 신자유주의는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로버트 노직 등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에 기반하여 오일 쇼크 이후 세계 경제 전면에 대두되었다.

 

(2)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특징 및 비판

 

a)   경제적 인간

 

신자유주의의 인간은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으로 자기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계산적 합리성만을 보유한 사람이다. 이는 토머스 홉스의 이성관이 투영된 인간의 유형이다. 홉스는 이성을 정념(passion)의 소산인 자기 보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이성을 철저히 이기적 이익 극대화의 도구로만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홉스적 인간은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존재로서 사회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경향을 지닌다. 이러한 인간들이 만드는 사회를 평화롭게 유지시켜 주는 것은“이기주의적 질서 체계”이다.[36] 시민들이 타인을 자발적으로 배려하지 않으며 도덕적인 요구로부터 자유로울지라도, 어떠한 이기주의적 질서 체계에 의해 공공복리는 저절로 생긴다. 그 질서체계가 바로 시장이다. 홉스의 이기주의적 인간관은 신자유주의와 만나면서 시장 메커니즘을 정당화시켜주는 기제로 작용한다. 모든 인간 관계는 개별 주체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경제적 인간의 이러한 도구적 사회 이해는 연대의식과 공동체의 관념을 결여한, 경제적으로 축소된 사회 관계를 만든다. 모든 사회 질서가 시장적 질서가 되는 것이다. 결국 경제적 자유주의의 시각에서는 정치적 행위와 경제적 행위가 개별 인간의 이기적 효용의 극대화라는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

           신자유주의가 전제하는 인간관은 기독교의 타락교리의 측면에서는 부분적으로 적절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은총을 고려한다면 지나치게 비관적이며 극단적인 인간 유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칼빈에 의해 지적되고 아브라함 카이퍼가 명료히 개념화한 일반은총은 이교도에게 나타나는 학문적 능력과 도덕적 덕에 대해 탁월한 설명을 가한다. "종종 이교도의 아름다운 성품과 열정과 헌신과 사랑과 솔직함과 신실함과 성실감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침묵하며 무시할 수 없”고, 자주“어떤 신자가 이와 같은 매력을 가지기를 소원할 때도 있다.”[37] 이러한 품성이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도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서“일반 은총으로 사람 안에서 죄의 활동을 억제하되, 부분적으로는 그 세력을 부수심으로써, 부분적으로는 사람의 악한 영을 길들이심으로써, 그의 나라와 가정을 교화시킴으로써 억제하”[38]시기 때문이다. 구원하지는 않지만 보존하는 은총인 일반은총을 외면한 채 모든 도덕적 부담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을 그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철학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것이 일면 타당할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인간을 평가절하 하지만 - 그 인간관 위에 세워지는 사회는 도덕적 방향타를 잃은 사회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이 이기적이므로 이기성을 통제하며 연대와 사랑이 증진되도록 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기성 자체를 규범적으로 인정해버리며 이기적 질서 체계를 사회의 중심 원리로 승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의 인간관이 짐승을 짐승이라고 본 면에서는 - 특별히 포악한 짐승이라고 - 기독교적 동의를 어느 정도 구할 수 있지만, 그 짐승의 난폭함을 억제할 필요 없이 그대로 난폭함 속에서 살아가자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b)   소유와 정의

 

소유 개념은 경제 정의와도 관련이 있다. 어떤 형태의 소유가 올바른 상태인지 규정하는 것이 경제 정의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에게 정의는“정치 권력에 의한 재분배를 의미하지 않으며, 재산권 및 계약의 존중을 의미한다.”[39] 노직은 재산에 대한 권리를 불가침의 절대적 차원으로 승격시킨다. 그에게 불가침의 재산권은 소극적 권리를 뜻하지 생명과 자유의 실현을 위해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 권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재산권과 다른 가치가 충돌할 경우, 개인의 권리인 재산권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개인의 소유권 행사가 환경이나 문화재 보존 등의 가치와 충돌할 경우에도 소유권은 침해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40] 하이에크도 시장의 자생적 질서에서 얻은 소득을 보장하는 소유권에 높은 우선권을 부여한다. 계약의 충실성과 소유권 존중이 자생적 질서에 기반한 열린 사회의 열린 윤리라면, 분배 정의와 연대, 정치 참여 등은 원시사회에 적용되던 저급한 윤리라는 것이다.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 이론은 시장이 국가 계획이나 통제가 아닌 자연적으로 발생한 질서 체계라고 말한다. 그런데‘정의’의 문제가 촉발되는 것은 인간이 상호간 의도된 행위를 할 경우이다. 자연재해를 당한 사람이‘불의’한 억압을 당한 것이 아니라‘불운’한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자생적 질서체계인 시장의 수많은 거래는 의도된 바가 아닌‘자연적’ 결과를 낳기 때문에, 시장에서 이루어진 소득 분배에 대해 재분배를 요청하는 소위‘경제정의’는 환상이다.

           소유권에 최고의 영예를 부여하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소유관점은 성경적 소유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성경은 각 가정의 안정적인 경제 생활을 위한 토대 마련과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의무를, 시장에서 형성되는 부의 병리적 불평등을 긍정하게끔 하는 재산권보다 상위 가치로 둔다. 재산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신 권리였다. 민수기 26장과 34장, 여호수아 13-19장은 종족(지파의 하부 집단)별로 토지가 배분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땅 할당에 대한 지루하리만큼 자세한 기록은 이스라엘에게 땅이 평등하게 분배되어 모든 가구가 자신의 생산 수단을 소유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평등한 분배라는 것은 모든 가족이 똑같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가족이 충분히, 즉 경제적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소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1]

분배된 토지는 거래가 가능했다. 땅을 판다는 것은 땅의 사용권을 판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거래를 통해 얻은 사용권은 결코 영구적이지 못했다. 희년의 때까지 시한부적으로 보장된 사용권이었다. 그래서 희년이 다가올수록, 희년이 되어 그 땅이 원래 주인에게 회복될 때까지 살 수 있는 수확량에 따라서 그 값이 떨어졌다.(레25:13-17)[42] 가난의 구조적 대물림을 방지하고 경제력의 집중에 시간적 제약을 가함으로써 부의 무제한적 축재를 부정한 것이다. 시장 가격을 지불하고 토지를 구입한 사람의 재산권보다, 불우한 이웃이 가난에서 벗어날 적극적 권리가 우선시된 것이 성경의 소유관이다.

마찬가지로 안식년과 이삭줍기에 대한 법의 취지도 재산권보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의무가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시장에서 이루어진 채권-채무관계도 안식년에는 청산되어야 했다.(신15:1-18) 채무자를 종으로 만들거나 그의 가진 재산을 남김없이 압류함으로써가 아니라, 빚 때문에 종 된 자를 풀어주고, 부채를 탕감해줌으로써 채무자로서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이삭줍기는 동냥과는 거리가 멀었다. 룻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이삭 줍는 사람들이 떨어뜨린 낟알을 모았기 때문이다.(룻2장) 그녀는 곡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다. 토지 소유자들은 밭에 있는 것을 모조리 추수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얼마간의 곡식을 남겨두어야 했다.

이렇듯 성경이 인간에게 절대적 소유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만이 만물의 궁극적 주인이기 때문이다.‘내가 만들었으니 전적으로 내 것이다’라는 주장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주장이다.(시95:4-5)[43] 경제생활의 토대가 되는 자연과 그 생산물은 하나님의 것이며(레25:23;시24:1;50:12;신8:17-18;26:10;욥41:11;출19:5), 엄밀히 말해 모든 인간은 땅을, 재산을 소유(owns)하는 것이 아니라 차지(possess)하고 있는 소작인이요 청기지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재산을 적절히 다루었는지에 대해 임차인인 인간은 주인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맥락에서 경제적 정의의 문제가 대두된다. 노직의 주장처럼 설령 과정에 있어서 세 차원의 정의 원칙[44]이 충족되어 갖게 된 소득일지라도, 성경적 관점에서 반드시 그 소득 상태를 정의롭다고 이해할 수는 없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관계적이다. 아무리 합당한 과정을 거쳐 얻게 된 소득이라도 이웃에 가난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그 부를 나눠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를 따르지 않을 경우 불의한 상태가 된다. 소유권보다 어려운 이웃의 권리가 우선시되는 것도 이러한 정의관과 연결되어 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예수는 그 부자가 나사로를 착취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눅16장)[45] 부자는 나사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다.(눅16:21)[46] 레위기 25장에 나오는“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로 시작하는 구절들은(25,35,39,47절) 어떤 원인에 의해 가난해졌든지 간에 - 개인적 책임이든 사회구조적 책임이든 -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명령하고 있다.

예레미야 22장 15-16절에서는 요시야 왕이 정의와 공의를 행했음을 말하며 그 정의와 공의의 구체적 내용으로“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한 것을 제시한다. 또한 욥은 빈민과 고아와 망하게 된 자를 도와준 것은 정의를 겉옷과 모자로 삼은 것과 같다고 말한다.(욥29:12-17) 즉 성경은 각각 어떠한 방식으로 소유가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부의 분배 구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정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분배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그 힌트를 희년에서 찾을 수 있다. 생산 수단(토지)을 주기적으로 회복시켜주는 희년은 한 가정이 “난처한 정도의 최소한이 아닌 이성적이고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겨지는 만큼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기”[47]를 바란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경제 제도였다. 모든 가족에게 동일한 수입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족 별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최소한의 의식주 욕구를 충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동체에서 존중 받는 참여자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자원을 소유하는 경제적 기회의 평등을 누리길 뜻하신 것이다.[48]따라서 소득의 분배 구조는 최고위층의 부와 특권이 아닌 최하위 계층들의 사회적 안녕과 경제적 생존이라는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49]

 

c)   시장과 국가개입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알레르기적으로 거부한다. 첫번째 이유는 신자유주의를 관류하는 절대적 소유권의 신화이다. 두번째 이유는 기술적 측면으로 정부 개입이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도덕적 측면으로 국가의 개입 자체를 부도덕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두번째와 세번째 이유를 집중적으로 살펴본 후 비판하도록 하겠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우월성을 확신한다. 우월성은 상대적 개념인데 시장은 국가에 비해 우월하다는 뜻이다.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긍정적 신념과 자유방임주의 정책이 효율성을 극대화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설령 시장이 잠시 동안 불안정성을 보여주더라도 시장은 곧 자율적 치유력을 발휘한다. 이런 불안정성은 성장을 위한 자연스러운 진통이다. 도산은 정부 구제가 아닌 기업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정부실패를 유발하는 국가의 역할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중앙 계획 경제가 끊임없이 변동하는 복잡한 현대 경제를 운영하는 합리적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한 점에서는 옳았다.[50] 그러나 이 견해에 기반하여 모든 형태의 국가 개입이 실패한다고 보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그 이유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전시나 우주 개발과 같은 거대한 목표가 있는 상황에는 국가 개입이 필수적이다.

둘째, 하이에크를 필두로 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체제의 분류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아니면 사회주의적 중앙계획 경제로 이원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의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조합주의 시장경제 국가가 있다. 한국의 경우 80년대까지 권위주의적인 산업 정책 국가로서 거시 경제 정책 면에서 자유방임적 경제 체제는 아니었다. 위 두 경제체제 모두 경제 발전에 성공했다.

셋째, 경제 세계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선 안 된다는 주장, 곧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이 불가하다는 주장은 무책임하다. 결국 모든 제도는 어느 정도까지는 불완전하지만 더 큰 불확실과 불안정을 막기 위해 고안해낸 장치이다. 외려 시장적 처방이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을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젊은 시절부터 철강 산업에 숙련된 노동자가 중년기에 해고되어 맥도널드 햄버거 패티를 굽는 경우처럼 말이다.[51]

마지막으로 시장은 결코 자생적이지 않다. 수많은 정치적 기제에 의해 형성되고 보완되는 하나의 인위적 제도가 시장이다. 재산권 등 시장 관련 사법제도를 설립하는 국가 없이 시장은 존립할 수 없다. 시장을 작동하게 하는 금융제도, 생산 인프라도 구축된 질서이다. 인위적 질서 위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상거래가 가능해지는, 근본적으로 제도의 산물인 시장은 따라서 자생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다. 시장은 제도적 메커니즘을 이해하여 결과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회 구조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생적 질서라는 허구적 개념을 전제한 뒤, 시장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자연의 산물로서 긍정하는 태도는 미신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기술적 측면에서 국가 개입의 효율성에 강한 의문을 보내지만, 설령 국가 개입이 시장의 효율성과 빈곤 퇴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측면에서 국가 개입에 반대한다. 자선이 아닌 강제적 부의 재분배와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은 부도덕하다는 것이다.[52]

이는 앞서 살펴본 개인 재산권을 절대성의 범주로까지 승격시키는 신자유주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 또한 경제적 인간으로서 자기 보존 욕구를 위한 계산적 합리성의 존재는 연대와 공동체적 관념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사회적인 것은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적 개인의 조직체인 정부는 본질상 확장 경향이 있는 필요악이 된다.

소유권과 인간에 대한 성경의 이해가 신자유주의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은 이미 논증하였다(II-2-(2)-a),b) ) 여기서 더 증명할 것은 성경이 실질적 자유의 실현을 위한 권세의 개입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과연 자선을 강제하는듯한 제도적 소득 재분배는 도덕적인가?

우선 성경적 정의가 엄격한 불편부당성이 아닌, 사회적 약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개념임을 지적해야겠다. 이사야도 여호와의 정의가 긍휼과 짝지어있다고 선포하지 않던가.(사30:18) 잠언 31장8-9절에는 왕이 해야 할 역할이 나온다.[53]

 

너는 말 못 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왕은 사회의 언저리에 있는 자들을 일차적 관심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시편10편,146편) 가난이 실질적 자유를 파괴하는 주된 요인임을 상기할 때, 왕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희년과 안식년으로 대표되는 경제 정의를 세우고 실질적 자유를 증진시킬 중요한 임무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왕의 사명은 약자가 고통 받는 정글적 사회와 시장에의 공권력 개입으로 표현된다. 로마서 13장 4절에서도 권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표현된다. 선한 목적을 위한 악한 도구가 아닌, 선을 베푸는 자로 묘사된다. 세속 정부는 일반은총의 제어 속에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부가 베푸는 선행은 제도적 차원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선행에 구약이 증거한 사회경제적 약자를 돌보는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면, 현대 세속 국가에서 소득 재분배를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부당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3.    신자유주의의 업적 검토

 

(1)  신자유주의 정책의 성격

 

신자유주의 정책의 성격은 국내적 차원과 국제적 차원으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국내적 차원에서는 민영화, 예산감축, 수량적 노동 유연성의 제고, 복지 및 공공 서비스 축소, 주주 이익에 부합하는 노동 관리 규율이 특징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시장 개방, 자유무역, 외환거래의 증가를 특징으로 한다. 국내와 국제, 이 두 차원을 관류하는 원리는 경제적 자유주의이다. 시장이 이루어가는, 그리고 시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놓는 시장근본주의가 경제적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의 본질이다. 따라서 시장이라는 제도의 대척점에서 그것에 조율과 규제를 부과하는 국가의 역할은 극적으로 축소되며 역할의 방향 또한 자본 친화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질서를 시장원리로 환원시키는 경향은 경제적 자유를 우상화하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동력이다.

되도록 많은 부분을 시장화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시도는 따라서 공기업의 민영화를, 복지와 공공서비스의 축소를 통한 그것들의 상품화를, 노동자소비자하청업체지역사회국가 등의 이해관계자에 대한 정의요구 없는 주주자본주의를 가져온다. 또한 시장논리의 우위 속에서 진행된 자본의 탈규제는 투기적 이익을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금융위기라는 대대적이고 주기적인 가뭄을 몰고 오는 투기적 자본을 배태시켰다. 이 파괴적 자본에 의해 금융위기를 맞은 국가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IMF등의 시장 근본주의적인 국제 기관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이는 자신들을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신자유주의적 개방과 개혁의 논리에 더욱 충실해지는 역설적 비극을 낳게 된다.

 

(2)      자유주의의 결과

 

경제적 효율성의 극대화를 염두에 둔 시장논리는 과연 현실에서 열매를 맺었는가? 신자유주의는 애초에 의도한 생산성 향상과 경제 성장, 그리고 국물 이론(trickle-down effect)에 따르는 만인 복리의 증진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는가? 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정책화된 신자유주의는 성과 측정에 충분한 데이터 베이스로서의 세월을 축적했다.

먼저 성장 분야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의 성과를 알아보자. 와이스브롯과 그의 공동 연구자들이 제공한 116개 국가에 관한 자료에 따르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60년과 1980년 사이에는 연3.1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지만1980년과 2000년 사이에는 연간 1.4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을 뿐이다. 보다 자세히는 라틴아메리카의 1인당 GDP성장률은 1960~1980년 사이에 연 2.8퍼센트 증가세를 보인 반면, 1980년과 1998년 사이에는 연0.3퍼센트 감소를 보였다. 또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의 1인당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1960~1980년 사이에는 36퍼센트의 상승을 보인 반면에 1980년과 1998년 사이에는 15퍼센트 감소를 보였다.[54] 개발도상국들의 1인당 평균 성장률은 1960~1980년 연 3퍼센트에서 1980~1999년 연 1.5퍼센트로 감소했다. 그나마 중국과 인도의 급성장이 없었더라면 이 수치는 더 낮아졌을 것인데, 이 두 나라 모두 신자유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던 국가였다.[55] 정리하면 모든 국가의 경제성장이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 20년 동안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평균적으로 크게 저조했다는 것이다.[56] 생산성과 효율성 극대화를 장담하며 경제성장에 자신만만했던 신자유주의의 호언을 생각하면 참담하고 민망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성장 지표 저조의 원인은 주주자본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주주자본주의는 주주 이익의 극대화가 곧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실현한다는 관점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주 이익은 주가와 배당률의 상승을 통해 실현된다.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분기별 실적 발표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노동자 임금 삭감과 하청업체의 납품원가 인상 억제로 비용 절감을 이룬다.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고용을 늘림으로써 역시 단기적 비용을 줄인다. 이는 실질 소득의 감소로 내수의 장기적인 위축을 초래한다.

 게다가 주가가 떨어지면 주식시장에서의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험에 노출되므로, 기업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사내 유보금을 높인다. 그래서 기업은 번 돈을 경원권 방어에 소진함으로써 투자를 통한 생산성 및 고용창출의 가능성을 그만큼 줄이는 것이다.

주주자본주의에서는 배당률이 높아진다.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주주 이익 실현의 한 방편으로써 높은 배당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단기이윤을 낸 것 중에서도 주주들에게 많은 배당을 하고 나면 그만큼 투자 여력이 떨어지게 된다. 높은 배당률은 금융에 의한 기업 소득의 유출과 그로 인한 고정자본에 대한 투자 저하를 유발하여 생산성과 고용을 저하시킨다. 결국 저성장, 고실업의 구조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고성장이 실패했으니 국물 이론(trickle-down effect)도 자연히 실현 불가능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대표 기수인 미국과 영국 경우를 살펴보자. 90년대가 미국경제 호황이라고 불리지만 당시 주식 시장의 호황은 상위 20퍼센트의 부자들만 부유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90년대 미국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아주 소폭(연간0.5%비율) 상승했다. 빈곤층 비율도 1989년에서 2000년 사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2000년 빈곤층으로 분류된 미국 가계의 비율은 9.2퍼센트였고 89년에는 10퍼센트였다.[57] 반면 임금격차는 급격히 확대되었다. 상위 100명 CEO들의 평균 연봉은 물가 상승률을 반영하면 130만 달러로 노동자 평균 임금의 39배 정도였다. 그러나 1999년에 이들 경영자의 평균 연봉은3750만 달러로 노동자 평균 임금의 1천 배가 넘었다.[58] 영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1979년에 평균 소득 절반 이하의 가정이 전체 인구의 9퍼센트였는데 1991년과 1992년 사이에 25퍼센트로 상승했다. 또한 90년대 거치면서 하위10퍼센트의 실질소득은 17퍼센트 하락했다.[59] 정부 개입 없는‘자연적’적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자유주의의 성과는 성장과 분배 모두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III.         결론

 

본고는 낮은 고용률, 치솟는 대학 등록금과 고이자의 학자금 대출, 중소기업의 채산성 악화와 한편에서 계속되는 대기업의 어닝서프라이즈라는 모순된 경제상황에 직면하여,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필자는 성서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함의를 읽어내어, 기독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체제 변혁을 향한 열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본래 의도한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적 합리성, 곧 효율성을 최상의 가치로 절대화하면서 삶의 양식, 사회, 정치를 시장 질서화 하려는 경향만을 강화시켰다. 사회성원의 행복과는 무관한 경제성장 수치에 애매한 위안을 받으며 시장의 물적 논리 강제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경쟁력이 없는 사람은 열악한 삶의 조건 속으로 빠져들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 실현의 기회를 상실 당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존엄은 경제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가격화되는 시장 질서 속에서 축소되고 비틀어져 버렸다.

           신자유주의 내부 논리에는 부의 집중과 극심한 양극화를 제어할 장치가 없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최적 수준의 생계 보장을 천명하는 희년의 정신과 배치된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군림한 지난 30년의 금융화가 초래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약탈적 대출을 통해 가계의 부채 더미 위에서 성장한 금융기관의 행태는 7년째에 빚진 노예를 풀어주고 채무를 탕감한 안식년의 원리를 배반한다. 더 나아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쉼 없는 강박적 자기계발과 스펙 쌓기가 만연해 있는 한국 대학생의 현실은 타인의 권위 아래에 눌려 있던 종과 나그네에게 휴식을 선포한 안식일의 사회경제적 함의와 어긋나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탄식과 울음에 반응하지 않는 신자유주의적 사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는 소돔과 고모라의 원형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겔16:49)

더 충격적인 점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따라갈 경우 권세에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명령을 거역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로마서가 쓰여질 당시 최고의 권세 기관은 로마 황제였다. 법치가 아닌 인치의 시절이었기에 법 위에 황제가 있었고 따라서 최종적 정치 권력은 황제에게 있었다. 그러나 헌정주의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복종해야 할 궁극적 권세는 행정부도, 입법부도, 사법부도 아닌 헌법이다. 헌법이 삼권분립의 정치체계를 규정하며 행정부의 수반과 입법부의 성원들, 그리고 사법부의 판사들이 1차적으로 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법치주의의 본질은 이처럼 통치자들이 헌법을 준수하는 것이다.[60]

바로 그 헌법이 경제 민주화를 명령하고 있다. 헌법 제119조 2항이 명시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필자 강조) 경제 민주화를 위한 소득 재분배 정책과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승인하는 헌법의 명령은 신자유주의의 정신과 화해할 수 없다. 헌법의 외침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관과 정책에 있어서 성경적 원리와 조화될 수 없는 신자유주의라는 자율 권세의 반역에 가담할 것인가. 필자는 이 질문을 던지며 본고를 맺는다.

 



[1] 새사연,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시대의 창,2009) P. 40.

[2] 성경에 등장하는 권세라는 개념을 마귀의 속박이라는 순전한 영적 해석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나 이데올로기로 해석할 근거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두 영역, 곧 ‘사탄적인 것’에 대한 두 개념 정의가 서로 뚜렷이 구분된다는 생각은 오늘날 어떤 이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존 하워드 요더,예수의 정치학(IVP,2007)P.247.참조)

[3] 김두식, 교회 속의 세상,세상 속의 교회(홍성사,2010) P.101.

[4] 클라우스 베스터만, 구약해석학(크리스찬다이제스트,1995)P.231.

[5] 크리스토퍼 라이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성서유니온선교회,2010) P.139-141.

[6] 클라우스 베스터만, 구약해석학(크리스찬다이제스트,1995)P.232.

[7] 크리스토퍼 라이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성서유니온선교회,2010) P.145.

[8] 물론 신정일치 사회인 고대 이스라엘과 현대 세속 국가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좀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데 이에 대해서는 II-1-(3)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9] 김정우, 구약해석학 논문집1(총신대학교출판부,1995)P.111.

[10] 칼빈, 기독교강요 2권 8장 31절 (크리스찬다이제스트,2003)

[11] Ibid, 2권8장 32절

[12] Ibid, 2권 8장 32절

[13] Ibid, 2권 8장 32절

[14] 물론 그 원리를 현대에 적용하는 방식도, 문화적 표현도 성경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 종교재판,마녀사냥,십자군원정,예배 강제 행위 등의 비()성경적임을 넘어서서 반()성경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원리를 적용하려는 시도는 적용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의미마저도 왜곡시키는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15] 어떤 형태의 국가가 - 왕정, 민주정, 신정 등 - 더 성경적인가에 대한 논의는 본고가 규명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의 범위를 넘어선다.

[16] 크리스토퍼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IVP, 2006)P.555.

[17] Ibid, P.552

[18] 존 하워드 요더, 예수의 정치학(IVP,2007)P.263.

[19] Ibid, P.430.

[20] ‘교회의 교회됨’이 사회변혁을 외면하는 도피적 성격으로 전용되지만 않는다면 경청해야 할 표어이다. 교회 내부에서조차 하나님의 원리가, 완벽하진 못할지라도 진실되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어찌 세상에 그 원리를 선포하며 나설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위선일 뿐이다.

[21] 존 골딩게이, 구약해석의 접근방법(크리스찬 다이제스트,2004)P.69.

[22]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의 경우 자유주의의 근거를 자연법이 아닌 공리주의에 두었다. 그 역시도 국가의 한계와 국가가 존중해야 할 정치적 자유의 내용에서는 로크와 대동소이 했지만, 사상적 기반이 다르며 자유를 효용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자유 그 자체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효용의 원리에 자유의 원리가 뒤로 밀릴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23] 노르베르토 보비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문학과 지성사,1992)P. 57.

[24] G. 사르토리, 민주주의이론의 재조명2(인간사랑,1999) P.521.

[25]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권리존중주의 국가와 최소 국가 중 하나의 개념만 내포하면 자유주의 국가라고 보았지만(자유주의와 민주주의, 21p) G.사르토리는 전자를 자유주의 국가의 본질로, 후자를 상황적 특징으로 간주했다.(민주주의 이론의 재조명2, 521p) 필자는 사르토리의 입장을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자유주의 사상의 태동이 권력 자체에 대한 반대에 있었다기보다, 그 권력이 폭압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부를 필요악으로 보는 자유주의의 관점도 결국 그 정부가 산출해 낼 부정적 결과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6] 김한원,정진영 엮음, 자유주의:시장과 정치(부키, 2006)P. 65.

[27] Ibid, P. 86.

[28] 로버트 노직은 사유재산권의 절대성을 강조하며 국가는 어떠한 경우라도 개인의 재산권과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강하게 피력한다.(자유주의:시장과 정치, 167p)

[29] G. 사르토리, 민주주의이론의 재조명2(인간사랑,1999) P.516.

[30] Ibid, P. 516-517.

[31] Ibid, P.510.

[32] 정진영 엮음, 자유주의:시장과 정치(부키, 2006)P.170.

[33] 물론 산업혁명 시기인 18,19세기에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한 자유 시장 및 자유 무역이 전적으로 정책화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제적 자유에 대한 논의가 현실 경제 영역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 산업혁명 시기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 뿐이다. 실제 영국이 실질적 자유 무역으로 전환한 것은 세계시장에서의 유리한 위치를 공고화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유럽의 각 나라가 산업혁명 초기부터 자유 방임적 경제 정책을 펼쳐나감으로써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es)의 주장에 대한 반박은 장하준의 저서“사다리 걷어차기”를 참고하라.

[34] G. 사르토리, 민주주의이론의 재조명2(인간사랑,1999) P.518.

[35] 구자유주의와 다르게 신자유주의는 정치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둘을 구분하기도 한다.(페터 울리히, 신자유주의 시대 경제 윤리(바이북스,2010) P.190.참조)그러나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학파가 정치에 지나칠 정도로 회의적이라는 면에서 이 둘을 정치에 대한 강조점을 기준으로 나누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36] 페터 울리히, 신자유주의시대 경제윤리(바이북스,2010) P.87.

[37]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크리스찬다이제스트,2008)P.148.

[38] Ibid, P.151.

[39] 정진영 엮음, 자유주의:시장과 정치(부키, 2006)P.162.

[40] Ibid, P.169.

[41] 크리스토퍼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IVP, 2006)P.217.

[42] Ibid, P.280.

[43] Ibid, P.229.

[44] 획득에 있어서의 정의 원칙, 이전에 있어서의 정의 원칙, 교정에 있어서의 정의 원칙(자유주의: 시장과 정치 178p)

[45] 로날드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IVP,2008) P.106.

[46] 우리는 이 구절에서 국물효과(trickle-down effect)의 잠재적 부당함을 예리하게 느끼게 된다.

[47] 로날드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IVP,2008) P.126.

[48] Ibid, P.126.

[49] 크리스토퍼 라이트,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IVP, 2006)P.73.

[50] 장하준, 국가의 역할 (부키,2009) P.67.

[51] 장하준, 국가의 역할 (부키,2009) P.90.

[52] 김한원,정진영 엮음, 자유주의:시장과 정치(부키, 2006)P.182.

[53] 왕정시대의 왕과 민주주의의 행정부 수반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권력의 기원과 행사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통치라는 기능적 유사성은 성경이 왕에게 내리는 명령을 현대 정부에 적용시킬 여지를 마련해준다.

[54] 장하준, 사다리걷어차기 (부키, 2004) P.234.

[55] Ibid, P.244.

[56] 장하준,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부키, 2008) P.32.

[57] Ibid, P.56.

[58] Ibid, P.57.

[59] 알푸레두 사드-필류·데버러 존스턴 편저, 네오리버럴리즘 (그린비, 2009) P.250.

[60] 헌법 제69조에도 대통령의 취임 선서에 헌법 준수 문구가 들어가도록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