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 보수, 극우, 진보, 좌파 등등. 이렇듯 사회 일반을 규정하려 시도하는 개념이 포착하지 못하는 특이점들은 항상 존재한다. 이해의 편의를 위한 도식화이니 위와 같은 개념 사용에 대해 다소간의 이해를 구한다.
한국 보수 목회자들은 한국을 반세기만에 전쟁의 참화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위대한 나라로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기적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결정적 상수로 작용했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한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 성장한 멋진 나라, 대한민국. 이것이 보수 교회의 대한민국관(대한민국을 이해하는 관점)이다. 그러한 대한민국관은 한국 극우의 대한민국관과 대동소이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극우 산업화세력이 일궈낸 "멋진 한국" 앞에 "하나님의 축복으로"라는 수식어가 붙는 정도이다. 극우와 주류 교회의 야합은 이북 해방공간과 전쟁직후의 혼란기 속에서 정초된다. 이북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개혁은 쁘띠 브루조아 계급인 북한 교회에 큰 경제적,사회적 타격을 주었다. 당시 북한 교회는 토지 개혁에 동참하여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반동 세력으로 낙인이 찍혔고 6.25 터지기 전에 대부분 월남을 감행했다. 계급적 이익을 위협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있던 한국교회는 급기야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이북 공산주의가 초래하는 생존 공포를 온몸에 새긴다. 이후 주류 교회는 전쟁의 공포와 침해당한 사적 이익의 아픔을 한국 세속 극우의 정치적 세례 아래서 이데올로기적 혐오와 연결당한다. 이렇게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하는 극우와 주류 교회의 밀월은 시작되었고 세속 극우와 정치관, 경제관, 대한민국사관 등 대부분의 비종교적 영역에서 사상적 일치를 보았다. 극우가 선창을 하면 주류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 아래서"라는 레토릭을 추가하면서 후창하는 꼴이 전형적 패턴이 되었다.
그러니 박정희, 전두환의 군부 독재가 이룩한 산업화 찬양과 그러한 산업화가 있었기에 치기 어린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가능했다는 견강부회식 사관을 교회가 그대로 답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계에서 반세기 만에 이런 업적을 이룬 나라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라고 외치는 목회자들을 설교석상에서 우리는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특히 광복절이나 현충일 즈음에 큰 교회를 찾아가보면 장로의 기도에서든 목사의 설교에서든 산업화와 민주화 달성을 찬미하는 문맥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들의 눈에 희안하게도 이 나라에 많은 병리적 현상이 보인단 말이다. 이혼비율, 교통사고사망비율, 자살율 등 좋지 않은 항목에서 OECD 선두를 달리고 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정상적인 목회자라면 극도의 압축 성장과정이 빚어낸 사회 구조적 문제로 감을 잡고 신학적 성찰의 작업을 할 것이다. 설령 기존 보수 교단의 목회자일지라도 심각한 사회적,개인적 병리성 앞에서 자신이 견지해온 대한민국관이 틀릴 수 있다는 건전한 의심을 가져볼 만했다. 근 50년간의 경제성장 수치에 은폐된, 금전적 가치에 매몰된 진짜 가치들-기독교적 가치들-의 소리 없는 비명을 이데올로기의 장막을 걷어내고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총"이 부어진 산업화 ,민주화(이것도 절차적 민주주의만을 말하는 것이다. 문화적, 실천적 민주화는 요원함에도 보수 목회자들은 이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인데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단 말인가? 이 "멋진 대한민국"의 건국과 성장 과정에서 불순한 요소, 치명적 결함 따위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현실을 굴절시키는 허위의식이 건부복음이라는 저질신학의 외피를 뒤집어 쓰고 목회자들의 사고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멋진 대한민국"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목회자들에게 한국의 구조적 병폐를 말하는 것은 타부다. 금기다. 그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통계가 증명하는 이런 병리현상은?(콤플렉스는 현실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게끔한다.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와 콤플렉스의 닮은 점이다. 그래서 보수 목회자들은 비정규직 문제, 복지의 문제, 국가권력의 민주주의 위협, 시장권력의 독재현상 등에 무지하다. 겨우 알 수 있는 문제는 통계수치들. 이를테면 이혼율 1위 등이다.) "대한민국은 위대해. 그렇다면...그래. 성도들이 회개해야 해. 세상사람들이 회개해야 해. 회개하라 ~ 회개하라 ~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여. 개인이 회개하고 착하게 살아야 이 멋진 대한민국의 문제들도 사라진다~!" 이런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하는 잠꼬대가 설교시간에 울려퍼진다.
개인의 윤리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교회에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윤리적 문제를 지적하는 이유는 그것이 "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확대 재생산하는 수많은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이 교회가 가진 중요한 사명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죄가 개인에게만 해당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정사와 권세, 즉 구조의 문제에는 왜 균형추를 두지 못하는가? 개인 못지 않게 그 개인을 옥죄고 비트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사회도 죄로 물들어 심각하게 고장나 있다. 국가도, 시장도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탈주하여 역주행 하기는 마찬가지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와 개발토건독재의 변태적 조합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교회는, 그 어느 집단보다도 예민하게 사회 악에 성령의 검을 들이밀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실종된지 오래다. 왜? 전술했듯이 주류 교회 눈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멋진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멋진 대한민국"콤플렉스는 보수 목회자들 사이에서 거의 집단 초자아 수준이다. 그리고 그 무의식이 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끼쳐 보수 목회자의 자아가 고도의 선택적 방식으로 한국 현실을 왜곡하여 인식하게 한다. 의식의 수문장인 자아를 돌파할 충격적 경험이 집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이상 현재의 일반적 보수 목회자의 사회 인식을 바꾸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 사회가 더 미쳐 돌아가도록 놓아두어야 구조적 병리를 감지하는 시점이 올 것 같다. 실상 이곳은 "멋진 대한민국"이 아니라 빨간 약을 거부하는 매트릭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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