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진리와의 인격적 접촉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역사를 운행하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라면, 어느 집단보다도 역사 선도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를 대안 공동체라고 하는 데는 교회가 가진 아방가르드적 속성에 대한 고려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을 게다.
실제 한국의 초대 교회는 구한말 조선사회에서 파격적인 전위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축첩제 거부, 조혼 금지, 반상 차별 철폐 등 복음이 가진 사회 변혁적 에너지를 마음껏 내뿜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죠선크리스도인회보>는 1898년 2월 3일자에서 “하나님의도를 믿는 나라들이 문명진보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가 사람 사랑하기를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평등권을 주어 압제하는 풍속을 없애며 서로 권면하여 착한 길로 인도하기를 주장하기 때문”[1]이라고 했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을 정치적 평등권으로 재해석하는 탁월한 신학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당시 서구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간과한 채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단순하게 연결하는 유아론적 오류가 발견되기는 한다. 하지만 구한말 조선의 처참하고 조야한 봉건적 정치상황을 고려할 때 이 허위의식은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 필요했던, 그래서 섭리 가운데 허용되었던 허위의식이었으리라.
위 신문의 다른 부분에서는(1900년 3월14일자) “사람의 자유 권리”라는 기사를 통해 신체, 집회결사, 종교, 언론의 자유 등 근대 서구의 자유 개념을 소개한 뒤, 이런 것을 교육하지 않으면 백성이 자유를 알지 못한다고 썼다.[2] 인간의 정치적 자유를 열렬히 옹호한 기독신문들은 구한말 한국 초대 교회의 혁명적 파토스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좋은 예시이다. 요컨대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역사의 수레를 앞장서 끌고 가는 선도적이고 전위적인 역할을 일정부분 담당했다. 미시 문화에서의 생활 변혁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정치 제도에까지 신앙에 근거한 개혁 의지를 관철시키려 노력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교회는 어떤가? 장로정치를 통한 민주주의의 신선한 실험장이었던 교회는 이제 담임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엄격한 하이라키(hierarchy)로 변질 되었다. 그리고 이 하이라키를 기반으로 봉건적 종교 권력체체로의 역(逆)탈근대를 감행하는 놀라운 상상력을 과시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몇몇 이름난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자식에게 당회장직(담임목사)을 물려준다. 북한을 그토록 혐오하기 마지 않던 반공주의의 선봉대인 한국 주류 교회가 북한식의 봉건적 권력세습을 스스럼 없이 실천하는 것이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종교 권력의 이양은 칼빈이 꿈꾸었던 교회 민주주의를 압살한다.
그 뿐인가. 고소영으로 대변되는 정치권력과의 유착 관계, 국보법 폐지 반대와 촛불 시위 반대 성명에서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반시민적, 반민중적인 성향. 게다가 한국교회가 자신의 도덕적 순결과 사회참여의 견실한 통로로 삼아오던 성윤리마저 불거지는 목회자들의 혼외정사와 성추행으로 인해 그 순수성을 의심받은 지 오래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더 이상 역사의 수레를 이끌어가지 못한다. 오히려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역사의 반동으로 기능하고 있다. 예수는 무서운 속도로 파멸의 비탈길을 탈탈탈 굴러가는 수레바퀴 아래에 자신을 집어 던짐으로써 죄와 죽음의 역사를 의와 생명의 역사로 전환시켰다. 수레 앞에 뛰쳐나가 선도적 역할을 할 힘과 영민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냥 수레 위에 올라 타기라도 하자. 최소한 진보를 가로막는 참담한 역사적 오류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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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100p
[2] 같은 책, 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