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 없이 곧바로 용서를 할 수도 있다. 상대가 내 발을 실수로 버스에서 살짝 밟았을 때는 순식간에 용서할 수 있다. 이는 마치 1+1이라는 문제에 별다른 계산과정 없이 곧바로 답을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삶의 한 부분을 허물어뜨리는 엄청난 공격 앞에선 길고 긴 풀이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껏 내가 접해온 일반적인 교회문화는 최소한의 풀이과정도 없이 곧바로 연립방정식의 해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구약 선지서들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의 악행을 향한 야훼의 분노와 비난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 정이 떨어진다. 거의 매 선지서에 비슷하게 잔인한 신적 분노의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바로 그런 분노와 비난과 비판의 지루하고 섬뜩한 과정이 있었기에, 당신에게 숱하게 깊이 패인 상처를 준 피조물들을 위한 용서와 구원의 십자가, 그 정답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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