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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후 에세이

계몽이 낳은 카인과 아벨 - 주체와 객체의 계몽주의 내러티브

계몽이란 이성의 주체적 사용을 뜻한다. 근대 이전에도 이성은 인간의 지적 작업에서 줄곧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다만 그 사용의 철학적 중심이 인간이 아니었다. 신, 관습, 공동체 등 개별 인간 외부의 어떤 거대한 원리나 초월적 인격체가 이성 활동의 준거점이었다. 그러나 근대의 여명을 밝히는 계몽의 시대에, 이성을 담지한 개별 인간이 이성 발휘의 주인이자 주체로 출현하는 철학의 인류사적 도약이 이뤄졌다. 따라서 계몽이 잉태한 근대의 성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체"이다.

 

그런데 이 “주체”의 개념에는 자율의 의미와 지배 및 통제의 의미가 섞여있다. 주체는 스스로를 주장하고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측면에서 주체가 그것 외부의 간섭적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자율적 성향을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주체는 개념적으로 객체를 상정한다. 주체 외부의 모든 사물이 객체로 대상화된다. 문제는 주객의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주체는 자신이 가진 이성을 통해 객체를 분석하고 학습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지식을 바탕으로 객체를 지배하고 불평등한 종속적 수직 관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물론 객체를 알아가는 이성적 학습이 지배를 필연적으로 담보하지는 않는다. 다만 주체가 객체를 이성적으로 지배하고자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근대의 초기에는 계몽이 지닌 해방과 지배의 모순적 내러티브가 상호간의 경쟁과 뒤얽힘 속에서 공존하였다. 한편에서 중세적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의 폭압을 배격하고 정치적 기본권의 주창과 인간 해방이 진행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과학 기술에 근거한 자연 지배와 노동 지배가 자본주의를 매개로 심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과 지배 사이의 긴장감 있는 대립은 세계 양차대전과 파시즘의 등장으로 종결된다. 지배의 내러티브가 해방의 내러티브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인류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가공할 집단적 폭력의 광기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계몽주의의 황혼 즈음에,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물적 제도를 토대로 가지고 있는 지배의 내러티브가 연약한 해방의 내러티브를 교살한 것이다. 전세계는 아담(근대)으로부터 나온 카인(지배)의 돌(파시즘)에 살해당한 아벨(해방)의 피(양차대전)로 끔찍하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