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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후 에세이

바리새인과 세리, 소수자들을 위하여



▲ 세리들(이탈리아 작가 미상, 16세기경) 

(출처 : http://m.cpbc.co.kr/paper/view.php?cid=445034&path=201303)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도의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태도가 극명하게 상반되는 지점에서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많은 경우 바리새인이 독사의 자식이라는 힐난을 들을 때 세리는 예수와 식탁 교제를 한다. 여기에서 불의를 보고 분노하는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편리하게 추출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분노하는 하나님을 뒷받침하는 본문들은 공세적인 사회참여 사역의 지지대이다. 하지만 교회 성원들에 대한 신앙적 돌봄, 더 나아가 교회 성원 간의 관계 맺음의 방식을 구성하는 차원에서는 큰 실익이 있을지 의문 - 물론 이것이 사회참여 사역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 사역의 본질적인 우월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이다.


그리스도가 사람을 가려서 대하고 극단적인 차별을 여과 없이 분출하는 다소 충격적인 복음서의 본문들로부터 우리는 도대체 어떤 신앙적 함의를 읽어낼 것인가.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를 교회의 유비로 본다면(13:24~30), 다양한 유대인 집단에 대한 그리스도의 상이한 태도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교회 사역의 준거는 과연 무엇일지, 더 나아가 2천년 전 예수의 사역은 현대 교회 내외부의 다양한 사회 집단 간의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해석하는데 적절한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인지, 이러한 물음들에 답해보고자 한다.


바리새인과 세리 : 공유적 속성


관습적으로 우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점에만 집중해 왔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 두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속성도 발견할 수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 모두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다. 바리새인을 향한 정죄는 복음서에 넘쳐난다.(3:7;12:34,39;23:13,15) 동시에 예수는 세리 또한 죄인으로 규정한다.


마가복음 2장에는 예수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제자로 포섭하며 세리들과 식사하는 장면이 나온다.(2:14~17) 이에 바리새인이 왜 세리와 식사를 하냐고 따지자 자신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응수한다. 세리들이 의롭고 좋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식탁 교제에 참여했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18장 산상수훈의 한 토막에 잠깐 등장하는 세리의 사례도 그들이 당시 유대교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수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처음에는 혼자 다가가 권고하고, 다음에는 한두 사람으로, 그 다음에는 교회 전체에 말하여 권고하되, 그럼에도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한다.(18:15~18) 여기서 세리는 회개치 않아 정죄 당한 죄인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한편 세례 요한의 전파에서는 세리도 독사의 자식이라는 비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3:7,8)라고 일갈한다. 세례 요한이 지칭한 이 무리에는 세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세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자 요한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말한다. 당시 패역한 세대(9:41)이자 독사의 자식을 구성하는 사회적 부조리의 대표 요소 중 하나로 세리가 지칭된 셈이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역할(7:27)이었음을 상기할 때, 요한의 세리에 대한 규정은 예수의 그것과 궤를 같이한다.


혹자는 세리의 죄가 바리새인보다 무겁지 않았고, 이것이 예수의 태도 차이를 초래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교만이 가장 큰 죄일진대, 바리새인은 교만하고 외식하는 자이지만, 세리는 자신의 관료적[i] 권력을 이용해 부당하게 돈을 강탈했을지언정 교만하지 않은 죄인이기에 예수가 전자를 더 싫어했다는 식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불의한 부유함 - 세리장 삭개오는 부자로 묘사된다(19:2) - ’의 신앙적 심각성을 과소평가한 이야기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라이벌로 재물(맘몬)을 가리켰다.(16:13) 맘몬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다른 신이고, 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교만의 가장 격렬한 증상이다.(13:9,10) 따라서 세리의 죄 또한 결코 교만과 무관하지 않다.


바리새인과 세리 : 비공유적 속성


이 같은 공유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전체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는 예수에게 매우 다른 대우를 받는다. 바리새인도 예수와 식탁 교제를 했지만(7:36;11:37), 교제의 끝은 대부분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의 모욕적인 언사였다. 그리고 이 둘 간의 교제, 또는 조우는 항시 바리새인이 예수를 먼저 찾아가는 형태였다.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행해진 설교도 예수가 먼저 찾아와 베푸는 법이 없었다. 니고데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바리새인이 예수를 찾아가서 진리의 말씀을 듣는다.(3:1~21) 반면 예수는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찾아가 말씀을 전하고 교제를 한다.(19:5) 이러한 차별적 대우를 결과한 원인은 무엇일까.


바리새인과 예수가 겪은 설전에 대해서는 비교적 답하기가 수월하다. 바리새인이 예수의 구원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즉 사안의 맥락적 심각성으로 인해 예수의 공격적인 대응이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해석은 예수에게 강렬한 적대감을 품지는 않았던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세리 삭개오에 대한 예수의 차별적 대우의 원인까지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예수가 충돌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공격했던 자들인데, 그러한 공격성을 보이지 않은 바리새인일지라도 예수가 먼저 다가가는 최대의 호의를 베풀지는 않았던 것이다. 삭개오도 예수가 자신의 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구원에 이르지 못했던(19:8,9), 그저 예수가 궁금했던 부자(19:2,3)였다.  


여기서 우리는 소외[ii]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반면 세리는 함께 식탁 교제를 하는 것 자체가 유대 공동체에서 부정한 일로 인식되었다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세리가 식사하는 것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9:11) 다시말해 바리새인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주류였던 반면에, 세리는 공동체로부터 질시받고 소외당하는 위치에 있던, 철저한 사회문화적 비주류였다. 따라서 예수는 세리가 지닌 금력[iii]보다, 그들이 처한 소외적 상황에 더 집중하고 그들의 삶에 다가갔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세리의 금력이 그들에게 사회문화적으로 존경받는 주류의 좌표를 선사했다면 예수의 반응은 달랐을 것이다.


소외자를 향한 예수의 관심은 복음서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세리, 죄인과의 식탁 교제를 본인 사역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동체에서 쫓겨난 이를 찾아가 위로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9:35)


시력을 되찾고 예수를 시인했다는 이유로 바리새인에 의해 출교된 맹인에게 예수가 먼저 찾아가 복음을 선포하는 장면이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그의 육체적 곤궁이자 인생의 큰 문제가 해결 되었을 당시에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그가 소외의 아픔을 당하는 시점에 복음을 전하며 위로한다. 이 같은 장면을 상기한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고(5:3),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는 복음(11:5)이라는 말씀에서의 가난에는 소외자로서의 가난, 즉 공동체에서 수용받지 못하고 주변인이자 비주류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정신적 곤궁 또한 포함되는 것이다.


궁극의 소외가 아닌 것


예수가 소외를 경향적으로 반대하는 공생애 사역을 펼쳤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예수의 대적인 바리새인이 식사를 초대하더라도 거부하지 않고 교제에 참여하였다.(7:36;11:37) 또한 그들과의 논쟁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자신을 시험하는 불편한 사람이라 하여 무시와 회피로 일관하며 상대를 소외시키기보다, 설령 고통스러운 싸움이 일어날지언정 적극적으로 상대의 주장을 논파하고 불붙는 토론을 이어갔던 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우리가 아는 주옥 같은 예수의 가르침들 상당수가 바리새인과의 쟁론 속에서 탄생한 것들임[iv]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예수가 모든 형태의 소외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으로 시작하는 출교의 절차에 대한 말씀(18:15~20)은 가장 최후의 수단으로 소외의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한다. 하지만 이러한 소외가 궁극적인, 영원한 소외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죄를 범한 형제가 교회 전체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8:17)고 말씀하신 그분이 찾고 다가가신 것이 또한 세리였기 때문이다. 같은 말씀에 대해 칼빈이 출교 당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거나 친밀한 접촉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그 사람을 돌이켜 덕스러운 삶을 회복하고 교회의 하나 된 교제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v]라고 주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26:14,15)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이었다.(23:6;3:5) 바리새인 중에서도 교회 박해하기가 열심이었고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했던 자였다.(3:6) 복음서에서 예수가 회칠한 무덤이요 지옥 자식(23:15,27)으로 일컬은 그 바리새인의 전형이었다. 그런 그에게 예수가 다메섹에서 현현했다.


유대교에서는 세리가 소외자였지만, 예수의 부활 이후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바리새인이 악마화되며 소외자가 되었다. 유대교가 세리를 죄인의 대명사로 썼다면 기독교는 바리새인을 죄인의 대명사로 썼다. 따라서 예수는 이러한 또 다른 소외상태를 해소하며, 바리새인의 소외가 궁극의 소외가 아님을 사도 바울의 예시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에서 읽을 수 있는 동적인 소수자 논의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이 같은 소외자 관점은 현대의 소수자 논의와도 연결해볼 여지가 있다. 소수자를 지배적인 위치가 아닌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현대의 소수자 논의는 지나치게 정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진행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다시말해 다수자가 소수자로, 소수자가 다수자로 전환되는 사회 구조의 역동적인 속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미국의 트럼프 열풍은 그간 미국 내의 유색인종에 대한 소수자 담론이 지닌 경직성을 드러냈다. 미국 내 다수자로 상징되는 백인들은 세계화로 인해 이민자가 증가하고 중산층이 무너지는 경제적 불안 상황[vi] 속에서 더 이상 이전의 다수자적 지위를 여유 있게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백인들 간의 경제적 계급 격차를 외면한 채, 이들 전체를 뭉뚱그려 여전한 다수자로 정의한 미국 리버럴들의 발상은 전체주의적이고 게을렀다. 낮은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을 가진 백인들은 레드넥이라고 비하되며 외려 소수자의 지위로 내려앉은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색인종 프레임에 갇힌 미국 민주당 진영은 변화한 사회적 맥락을 읽지 못한 채 정태적인 소수자 논의를 대선 내내 이어갔고, 이것이 패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전술했던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의 태도 변화는 소수자 논의가 동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유대교 내에서는 다수자였던 바리새인이 기독교 내에서는 소수자가 되고, 이러한 소수자에게 또 다시 다가가는 예수(26:14,15)로부터 우리는 특정 집단의 전사(前事)에 포획되지 않은 채 소수자를 변화한 맥락에 맞게 재정의하며 소외를 최소화하는 사역을 이어갈 수 있다. 그 사역의 영역이 교회가 되었든, 사회가 되었든 말이다.

 

 

생각할 거리들


1.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어 보기.


2.     보수적인 교회와 진보적인 교회의 차이를 알아보고, 각 교회 별로 바리새인과 세리로 지칭 될 수 있는 교회 성원의 유형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토의하기.


3.     교회 내의 소외문제를 해소하고 소수자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교회적 노력에는 무엇이 있을지 토의하기.

 

 

 



[i] 세리의 신분이 관료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행사하는 권력의 성격이 관료적이라는 뜻이다. 세리 권력의 근원이 국가 시스템이고, 결과가 국가 권력의 유지·강화였기 때문이다.

[ii] 소외는 개인이 다른 개인이나 사회 집단으로부터 제도적, 문화적, 정서적으로 이격된 상태이다. 그리고 이 이격됨은 다른 개인이나 사회집단이 지닌 폐쇄성에서 기인한다.

[iii] 당시 세리의 재산상태에는 이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바리새인 니고데모의 사례와 대비되는 부자 세리장 삭개오에 대한 예수의 편향성으로부터, 여전히 금력의 여부보다 심리적 소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수 사역의 특성을 파악하는데는 무리가 없다.

[iv] 마태복음9:11~13;12:22~35,38,39;15:1~20;22:15~22,34~40

[v] 칼빈, 기독교 강요 최종판 하권 (크리스챤 다이제스트,2003) P.282.

[vi] “1970년부터 2015년 사이 미국 중산층의 비중은 전체 61%에서 50%로 감소한 반면 고소득층은 14%에서 21%로 증가했다. 빈곤층은 25%에서 29%로 늘었다. 백인의 인구비율은 2005년부터 2015년 사이 66%에서 62%로 감소한 반면, 히스패닉은 15%에서 18%, 흑인은 12%를 유지하는 등 인구학적으로 유색인종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트럼프당선이 부른 포퓰리즘시대원인은 反주류 아닌 진보의 실패>,<<헤럴드경제>>,(2016.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