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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09년]사회참여적 기독 공동체로의 초대

1.       초대

 

이 글은 구원 받은 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아가 변혁되고 죄로 인한 삶의 어두운 부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혁파 당하는 구원의 능력을 맛본, 그리하여 십자가의 순례길에서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속시키는 구원(롬8:39)의 삶을 지금 은혜 안에서 살아내려 노력하며, 궁극적으로 육체의 부활이라는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하는 글이란 뜻이다. 이들은 성령의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께 배우는 제자로서 순복해야 할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며 인생 끝날까지의 반려자로 기꺼이 모신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동일한 반석 위에 발을 딛고 서서, 이 터 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건물을 금과 은으로 짓는데(고전3:11-15) 동역할 기독청년들이 부름심 받기를 소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우리의 동역인가? 복음이 꽃피운 자리에서 발하여지는 기독교적 사회참여의 향기를 머금고 세상의 공기 속으로 섞여드는데 함께하자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우주적 세력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세상에 나아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시24:1)”임을 선포하며, 정치,경제,과학,문화,사회 등 우리 삶의 모든 공적인 분야가 단 한 평도 남김없이 주님의 땅이라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담대한 외침을 함께 울리자는 것이다.

물론 기독인은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했던 이유인 한 개인의 구원을 중대한 관심사로 두어야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죄에 빠진 백성들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사람들, 즉 신자들 가운데 이루어지는 신적 통치이다(John Stott).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고사하고 볼 수조차 없다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요3:3-5).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 모두가 누리는 기독교화된 사회, 불의한 제도와 문화가 개혁된 사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에는 무력이 아닌 진리와 사랑으로 사회적 악이 제압당하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라는 선포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민평등이란 영적원리가 도출된다. 그런데 이 영적인 원리가 국가 통치 질서로 전환되는데는(바울 서신으로부터 1833년 영국의 노예제 폐지까지를 기준삼는다면) 약 1800년의 세월이 걸렸다. 역사를 뚫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공시적 공간에서 마주하는 세속 공동체를 향하여 선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끼치면서, 그 나라의 원리는 역사의 통시성 속에서 점차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사탄의 나라로부터 개개인의 구원이지만, 그 구원하심을 통해 주님은 사회적 악을 패퇴시키는 사회개혁의 사명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징집하신다. 이는 마치 은혜의 값없는 구원이 개인의 도덕적 삶을 구조적으로 동반하게끔하는 주님의 섭리와 비슷하다. 도덕적 삶을 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 구원이 필연적으로 신자의 도덕적 반응을 가져오듯이, 도덕적 제도와 선한 문화를 영위하는 인류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세속공동체의 도덕적 반응을 끈질기게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신적 동력을 가지고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침투하는 것은 기독인들만의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2.       어떠한 사회참여인가

 

           1982년 6월 로잔 위원회와 세계 복음주의 협회의 공동 후원 하에 미국 그랜드 래피즈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에 대한 협의회(CRESR)”가 열렸다. 그 협의회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복음주의적 헌신”이라는 보고서를 발행했는데 그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회참여를 두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사회봉사(social service)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회활동(social action)이다. 그 보고서에서 제시한 유용한 도표를 인용하겠다.

 

사회 봉사                       사회활동

인간의 필요를 구제              인간의 필요의 원인을 제거

자선 활동                         정치 경제적 활동

개인과 가정 대상으로 사역     사회 구조 변혁

자비 사역                         정의 추구

 

이중에서 특별히 우리 소그룹이 지향하는 바는 사회활동(social action)이다.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회의 사회참여는 주로 사회봉사에 국한되어왔다. 그런데 사회참여의 주요 동기 중 하나인 이웃사랑을 생각해보자. 일자리 없는 이웃에게 가난할 때마다 빵을 가져다 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그 가난의 원인인 실업을 제거하여 일자리를 갖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사랑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기독인이라면 노예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와 미국의 찰스 피니처럼 노예제 철폐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이웃을 향한 불붙는듯한 사랑은 구조개혁, 문화개혁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한다.

          

성경은 법자체가 불의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포한다.

 

“부패한 왕권이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만든 법은 백성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쉬운성경)…….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개역개정)”(시94:20,23)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10:1-2)

 

           불의한 제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맹렬하다. 국가의 통치에 복종하라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롬13:5;벧전2:17;딛3:1;벧전2:13-14;딤전2:1-2)에 대한 세심한 신학적 분석은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21세기 한국의 민주정치제도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주님이 주신 합법적인 개혁의 방편을 그분이 기뻐하시지 않는 제도와 문화를 고치는데 사용할 의무가 있다. 민주시민으로서 부름받은 것은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그분의 사랑하시는 세상을 돌보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힘으로 법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제도가 마련된 국가에서 불의한 세상을 간과한다면, 이는 좀더 나은 세속 공동체로의 발전을 위해 주님이 주신 권세를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3.       이 소그룹이 구체적으로 할 일들은? “안경 만들기” “준비” “참여” “기도”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상을 창조 때의 근사치로 돌려놓기 위한 기독인의 변혁적 노력은 세상을 품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먼저 세상을 바라보는 하늘 아버지의 시선을 닮아야 한다. 따라서 이 소그룹의 처음 주된 사역은 독서와 나눔을 통한 “안경 만들기”가 될 것이다. 말씀묵상과 기독교 세계관 서적의 탐독이 추구하는 깊이있는 성경 이해는, 삶의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이슈들에 당황하지 않고 그것들을 차분히 바라보며 기독교적 입장을 정리할 능력을 길러준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세상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신 지혜(단1:17)를 구하며 인문학과 사회과학 서적들을 말씀의 용광로 안에서 성령의 불로 녹여내는 비판적 수용을 노력할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의 표면을 꿰뚫고 저변의 뼈대와 심장을 관통하는 예리한 기독교적 지성이 함양되며, 구조 개혁이라는 성서적 사회참여를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다. 이 “준비” 이후의 구체적인 “참여”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청년의 때에는 “참여”의 방식이 제한될 수 있지만 우리의 “참여”는 중년과 노년에도 계속될 것이다. 공동체 성원간의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점은 하나님의 간섭과 참여를 촉구하는 “기도”야말로 이 공동체를 세워가는 가장 큰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이다. 46년동안 노예제 폐지를 위해 투쟁했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클라팜’파는 비록 적은 수의 무리였지만 함께 모여 하루에 세 시간씩 그들의 노예제 폐지 사역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제가 폐지되는 그 해에 죽었다. 46년을 이끌어 온 것은 사람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였고 그 의지는 기도할 때 가장 강력히 그들의 가슴을 내리치며 천만인이 진을 친 것 같은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던 것이다. 시종을 기도로 주님께 맡기며 독서하는 사회참여적 기독인들, 이것이 우리 소그룹의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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