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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0년]포스트 모더니즘만을 주적(主敵)으로 착각하지 말라

시중에 넘쳐나는 기독교 세계관 서적이 포문을 겨냥한 대상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절대적 진리의 부인과 넘쳐나는 일면적 진리의 파편 속에서 복음 전도에 어려움을 느끼는 기독인들에게 필수적으로 권해 마땅한 책들이다. 그런데 복음 사역이 맞딱뜨리는 현장에, 그것도 한국적 상황에 필요한 항체가 포스트 모던에 관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는가?

 

기독인이 추구해야 할 삶이 하나님의 드러나심, 즉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그분의 속성과 반대되는 모든 것에 철퇴를 가할 줄 아는 신앙적 기백이 요청된다. 그렇다면 비단 복음 진리의 명시적 제시에 대항하는 이 시대의 지적 맥락뿐만 아니라, 더운 숨과 살이 부딪쳐 빚어내는 일상의 지평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습격해 들어오는 항신적 관습과 문화에 대해서도 기독인은 깨어 경계하는 감시견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대의 지적 흐름이 그 사회의 전통과 관습이 되기까지는 일정 정도의 시간 정체가 발생한다. 따라서 새로 주입된, 혹은 내생적으로 배태된 사상이 충분한 발효 기간을 거치지 못한 사회는 형이상학의 흐름과 형이하학의 삶에 괴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듯 지적 조류와 생활의 관성 간에 드러나는 격차는 하나님 나라의 안착이라는 목표를 구체화할 때의 전략을 다원화 할 것을 주문한다.

 

한국의 기독인은 이 땅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이상학적 재료가 육화되어 삶의 관습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공간인지를 물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거칠게 말해 모더니즘이 봉건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산고에서 나온 자식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추앙했던 ‘주체’의 합리성을 해체시키며 근대의 모순을 돌파하기 위해 고안해낸 인류의 지적 산물이다. 결국 전근대성이 해결된 사회가 근대적, 곧 모던적 사회이며 그 모던성이 전제되어야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만개하는 것이다. 그럼 한국 사회는 봉건의 암흑을 거둬내고 계몽의 낭만적 꿈 속에서 방긋거리다가 돌연 근대의 낙관에 실망하고서 포스트 모던으로의 발걸음을 노정하고 있는가? 결코 아니다. 한국은 기계화와 정보화에 있어서는 근대를 이룩했을지언정, 문화와 관습은 너무도 전근대적이다. 중세의 그림자는 여전히 한국 시민들의 얼굴에 짙게 내려앉아 있다.

 

한국 대학가에서 선배의 술 권유(실은 강제)에 못이겨 음주를 하는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된다. 징병제 군대에서 자행된 폭행으로 남성 뇌리에 둥지를 튼 트라우마가 가정 폭력과 여성차별, 그리고 물리적,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및 폭압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전이되는 과정은 가히 경악할 만하다. 최소한의 합리성조차도 몰아내는 끈적끈적한 학연,혈연,지연의 연고주의 트라이앵글은 단기적으로 그 패거리 바깥 사람들에게 좌절을, 장기적으로 살기 좋은 공동체를 위한 추동력을 갉아먹는 역겨운 삼각형이다. 한 사회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대학 교수들마저 권력관계를 이용해 조교를 비롯한 대학원생들을 상아탑의 노예마냥 사적인 일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동원하는 모습은, 푸르른 자유로 상쾌해야 할 대학의 공기를 오염시키는 악취나는 추태이다.

 

           근대의 시발을 데카르트의 선언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규정한다면, ‘나’라는 확고한 주체가 형성된 사회를 근대적 사회라 명명할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인들이 가하고 당하는 슬픔의 근저에는 집단주의와 권위주의가 집단 자아 속으로 개인을 비틀어 흡입하는 헤게모니로 작동하고 있다. 이 말인즉 집단 자아가 개인의 주체를 형성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그리고 그 전근대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인들의 심성은 파괴되고 서글픔은 증폭∙재생산 된다.

 

           탈근대(포스트모던)는 통일되고 조화로운 ‘주체’ 개념의 환상을 부수면서 등장한다. ‘나(의식)’도 모르는 ‘내(무의식)’가 ‘나’를 구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주체’를 해체시켜버린다. 고로 프로이트가 던진 ‘무의식’ 담론의 돌덩이가 근대 철학의 머리에 떨어져 빈사상태에 이르게 했다는 이진경의 진단은 적확하다. 그런데 한국? 개인의 건전한 주체가 형성조차 되어 있지 않은데 무슨 해체를 하겠다는건가? 해체할 주체가 있어야 해체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서구 기독 사상가들이 두려워하는 포스트 모던의 물결 속에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한 분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국 성도들이 부딪치는 일상의 가나안 문화는 아직 포스트 모던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원시적이고 봉건적인 문화의 잔재, 아니 몸뚱이가 여봐란듯이 남아 합리적 사고와 문화를 질식시키고 멸종시키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한국의 신학자와 목회자는 따라서 주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복음을 언어적으로 선포하는 가운데 맞딱뜨릴 포스트 모던의 반격에 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국이라는 세상이 당하는 전근대적 아픔을 이해하고 치유하기 위한 노력 또한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올바른 현실인식이 결여된 선포는 케뤼그마적 호소력은커녕 형이상학적 낭비로 휘발되어버리고 만다. 진정 예수의 심정으로 성도와 세상의 상처를 보듬고 복음적 해결을 짚어내는 목자가 그리운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