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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0년]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통상적 정의는 이것이다.

“신자들 가운데 행해지는 하나님의 통치”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점하고 있지 않던가? 교회 바깥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다. 과연 만물은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이라(롬11:36)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말하는 그분의 통치란 무엇인가? 신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통치와 만물에 뻗혀있는 그분의 통치 사이에 다른 점은 무엇인가?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게 해달라는 간구는 도대체 절대주권과 조화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일진대 하늘의 뜻과 땅의 현실 사이의 괴리는 무어란 말인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도, 볼 수조차 없다(요3장)고 하신 예수의 말씀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물과 성령, 거칠게 말해 전자는 죄사함, 후자는 죄통제의 능력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겔36:25-27) 죄는 하나님 나라로 이르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죄의 역할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소통 경로를 끊어놓는다. 소통! 중요한 지점이 나왔다.

 

원래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하나님과의 소통적 관계로 부름받았다. 특히 인간은 언어적 존재로 창조되어 하나님과의 명제적 의사소통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인간을 통해 인간 이하의 피조세계는 하나님과 샬롬의 상태를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과의 충분한 교감 속에서 당신의 세계 경륜의 지혜를 미리 알고 그것의 시현을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인간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으로 그 두 존재간의 밀착되고 애정어린 소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전히 존재하시며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은 당신의 피조물과의 명제적 소통방식을 폐기 또는 축소하시게 된다. 인간은 혼미한 죄의 안개 속에서 그분의 경륜을 어렴풋하게나마 더듬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선명한 시선으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통치는 그 방식을 변경한 것이다.

 

언어명제적 의사소통이 불편한 오감적 의사소통으로 환치된 역사의 비극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갈구하는 모든 간구가 겨냥한 지점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창조 때의 원활하고 선명한 명제적 소통의 회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치라면, 절대주권적 의미에서의 통치는 침묵 가운데 피조세계의 손을 잡고 당신의 경륜 속으로 진입하는 신적 행위로서의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