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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1년]라캉의 주체

프로이트가 학문적으로 정식화시킨 무의식의 개념은 기존의 통일적이고 조화로운 주체에 대한 근대 철학의 관점을 결정적으로 분쇄하는 데 기여하였다. 기존 철학에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의식 저변에서 의식에 강력한 규정력을 발휘하는 무의식의 발견은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가능케 했다. 의식만을 주체의 전부로 간주했을 때 주체란 인간 활동의 통일적 중심이다. 그러나 무의식이 개입하는 순간, 주체는 통일이 아닌 분열적 요소들의 결합물이 되며 더 이상 이성적 중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근대적 주체와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실존철학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은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실존 철학의 주체가 여전히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을 강조하는 반면, 프로이트의 주체는 무의식에 의해 포획되고 조종당하는 비자유적인 주체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와 프로이트는 어느 정도 대립적인 철학 전선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문제의식을 비판적으로 심화시킨 것이 라캉이다. 라캉은 후기 구조주의자로 불린다. 구조에 의해 강제되고 규정당하는 인간 주체를 말했다는 측면에서 구조주의자이며, 그 구조를 가변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후기” 구조주의자로 분류된다.

 

라캉에게 있어서 자아는 오인에서 시작된다. 자아의 형성은 거울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실제의 자신이 아닌 유사자와의 동일시가 자아의 시작이다. 우선 거울에 비친 모습은 아이에게 타자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직접 경험한 몸이 신체 운동이 부자유스러운 조각난 몸인데 반해,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통제 가능한 조화로운 총체로서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타자간의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동일시이다. 유사자와의 원초적 동일시를 통해 “자기상”을 확립한다. 이렇듯 인간 정신은 시작부터 타자와 함께한다. 결국 주체의 가장 깊은 핵심에는 타자성이 존재하며, 이는 주체가 근본적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통일과 통합의 가능성이 애초에 결여되어 있음을 뜻한다.

 

동일시는 상상계를 구성하는 주요 요건이다. 이 상상계에는 금기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에 수용되고 사회적 주체로서 기립하기 위해서는 금기를 내면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금기의 내면화는 욕망의 억압을 뜻한다. 이 억압은 상징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상징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곳으로, 법, 금기, 율법의 영역이다. 상징계로 진입한 주체가 상징계의 역동적 구조에 의해 형성되는데, 그 구조는 언어의 구조이다. 즉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적 구조는 주체 이전에 존재하며 주체와는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언어적으로 구성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며, 주체는 타자의 담론 안에서 형성된다.

 

타자의 담론에 들어간다는 것은 타자가 지정하는 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가 지정하는 것 자체가 타자의 욕망이고, 따라서 그 자리를 수용하는 것은 타자의 욕망을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타자가 지정한 자신의 자리를 수용함은, 타자의 욕망에 부합하려 한다는, 즉 타자의 인정을 받기 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타자의 담론 체계인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어적으로 짜여진 타자의 욕망은 욕망의 무한한 환유 연쇄를 일으킨다. 대타자가 지정한 자리를 받아들인 나는 주체가 될 수 있지만, 이것은 본래의 나와 형성된 주체 간에 틈이 존재하게 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래의 내가 가지고 있던 욕구와, 그것을 타자의 질서 속에서 구현한 요구 간에는 넘을 수 없는 근원적인 틈이 발생한다. 이 틈, 결핍을 메우기 위해 욕망은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 나서지만, 그 대상은 틈을 완전하게 채울 수 없다. 따라서 욕망은 계속해서 그 욕망의 대상을 인접한 것들로 바꿔나가는데, 이것이 욕망의 환유 연쇄이다. 기표와 기의 간의 근원적 틈이 기표와 기의 간의 끊임없는 미끄러짐과 그로 인한 기표의 환유 연쇄를 발생시키듯이, 욕망과 욕망 대상 간의 끝없는 미끄러짐은 지속적으로 대체되는 욕망 대상과 그로 인한 욕망 대상의 환유 연쇄를 초래한다. 언어와 욕망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대체작용을 무한히 해나가는 가변적 구조이다. 이러한 가변적 구조 안에서 형성되는 주체 또한 비동일적이고 분열적이며 비불변적이다. 타자로부터 시작하는 라캉의 주체는 스스로 중심을 지니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탈중심적이다. 결국 타자의 욕망과 타자의 담론이라는 무의식의 구조에서 형성되는 주체는 동일자로서 불변적인 중심을 가진 전통적 주체를 해체시킨다. 주체는 통일과 조화의 자율적 그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구조가 만들어낸 분열적 결합물이자 비자유적 주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