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of the fittest : 적자생존
고기를 씹을 수 있는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우유와 무른 것만을 겨우 소화하는 연약한 신앙인도 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요 교회의 몸이다. 신앙이 강한 사람은 선인장에 비유할 수 있다.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고 비가 안내리는 긴 가뭄의 사막에서도 수분을 머금고 푸르름을 유지하며 버텨내는 선인장. 이 선인장 신앙인은 비우호적인 신앙 환경을 능히 초극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다. 아무리 설교가 실족을 유발하는 기괴한 내용을 담고 있어도, 불친절과 냉랭함이 교회를 휘감고 있어도, 성도들 개별 삶의 내용에 긍휼 아닌 정죄의 촉수부터 드리우는 분위기에서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이너서클의 전횡에 아가페(자비)는 실종되고 조건적 사랑인 필리아(우정)만이 편만할지라도, 선인장 신앙인은 살아남는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며 저 멀리 보이는 시온성을 향해 눈물의 골짜기를 뚜벅뚜벅 걸어가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신앙인은 다르다. 잘못된 설교에 실족한다. 불친절과 냉랭함에 깊이 패인 상처를 받고는 쓰러진다. 기껏 용기내어 삶을 나누었다가 곧바로 들어오는 정죄의 예리한 끌에 이내 마음을 닫아버린다. 성격 좋고 교회 사역 잘하는 신실한 선남선녀들의 이너서클에 편입되지 못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외감에 깊이 침잠한다. 쉽게 말라죽는 여리여리한 꽃송이 같은 존재이다.
선인장만 살아남고, 꽃들은 밟혀 죽는 상황에 대해 교회는 뭐라고 말할까. “자, 여기 꿋꿋이 살아 있는 선인장이 있지 않느냐. 이 믿음의 사람을 본받으라! 그리고 남의 말과 행동에 쉽게 상처받고 실족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완악함을 돌아보라.” 이렇게 말할텐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수용하고 품으라 했던 성경의 말씀(롬14:1)과 사뭇 다른 처방이다.
오히려 완악한 편은 완악한 자에게 상처 입는 사람이 아니라, 연약한 신앙인이 상처받고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구조와 그 구조의 방관자들이다. 연약함이 강함으로 바뀌는 치유와 회복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회복은 척박한 사막에서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연약한 자를 받지 않는 곳에서 치유의 역사를 기대하기란 적절하지 않다. 영적인 강자만이 살아남는 교회, 그곳은 하나님 나라의 적나라한 선취로서의 공동체라기 보단 "적자생존"이 그럴듯한 종교 언어로 포장되어 있는 또하나의 정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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