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성전건축이 한창이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 시대에... 건물로서의 성전이 가졌던 본래 기능은 속죄제사를 통해 죄로 이격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동물의 피가 어찌 속죄기능을 할 수 있었으리요만은(히9:9b), 그 제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십자가 제사(히9:12)에 대한 예표로서(히9:9a) 의미와 기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죄 해결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출25:8;신12:5;왕상8:13;9:3) 영광스러운 임재(출40:34-35;왕상8:10-11)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성전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출25:22b),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사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성전에서 인간 제사장에 의해 드려지던 속죄제사가 그리스도의 스스로 대제사장 되심과 제물 되심의 완벽한 십자가 제사로 인해 폐지되었다. 또한 예수가 친히 성전이 되어(요2:21)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였으며(요1:14), 승천 이후에는 성령께서 우리 각자와 성도들의 공동체에 임하심으로써 구약의 건물 성전 위에 내려앉던 하나님의 영광이 믿는 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임하게 되었다(행2:33). 이런 맥락에서 신약에서는 우리의 몸(고전6:19)과 성도의 공동체(고전3:16-17;고후6:16;엡2:21-22)가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지으신 새 성전은 결국 교회인 것이다(삼하7:11-16).
그런데 왜 목회자들은 새 성전 건축이라는 표현을 건물에 적용할까? 정말 몰라서 이러는 것일까? 세간에 통용되는 명칭들 중에는 엄밀한 학문적 정의(definition)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사람이 텅 빈 언더우드 교육관을 갈 때에도 ‘교회에 간다’라고 말한다. 교회는 성도들(고전1:2)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에 용어의 정밀함을 기하지는 않는다. 잘못된 용어의 사용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면 용인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성전용어 오용은 교회적 차원의 잘못을 범하게 한다. 목회자들의 성전 용어 사용의 맥락은 이렇다. 교회당은 거룩한 주의 전, 곧 성전이다. 따라서 다윗이 수만 달란트의 재료를 모으고 솔로몬이 수년의 세월에 걸쳐 전 이스라엘적으로 성전을 지었듯이 우리도 헌신해야 한다. 고로 약정하자. 대충 이런 식이다. 성경을 연구한 전문가들이 예배당을 성전이라 생각하는 신학적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더 나아가 잘못된 신학으로 인해 성도들의 헌신을 요구하는 선포가 거짓에 기반하게 되었다. 너무 과격한가?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넘어가지 말라는(고전4:6) 성령의 권고를 외면할 수 없다. 그들이 계속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예로 든다면 그러한 구약적 성전, 곧 피뿌림의 제사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빛으로 가시적 형태를 띠는 곳(출40:34-35;왕상8:10-11)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겠다. 그럼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누가 성전 건축을 말하면서 속죄제사 하자는 것인가? 예배할 공간을 위한 건축이고 구약적 예배와 신약적 예배의 연속성을 본다면 건물을 성전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 사이에는 관련이 있다. 그래서 몸으로 산 제물을 드리는(롬12:1) 우리가 성전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도 개인의 몸과 성도의 공동체가 성전의 의미로서 신약에서 부각되는 것이다. 교회당이 성전이라고 우기고 싶다면 우리의 성전용어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못박고 시작하라. 괜히 애꿎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 본문을 끌어들여 마치 자신들의 성전이 성경적 개념인 것처럼 속이지 말고. 속일 의도가 없었더라도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기에 거짓된 선포이다. 비싼 비용을 들여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정확하고 올바른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더 많이 알고서도 열심히 연구하지 않는 것은 필경 게으름이다. 목회자의 게으름이 한국 교회를 망친다. 아니면 설마, 알면서도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는가? 감히 성경을 거슬러서? 목회자가?
예배당 건축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은 공동체에 덕이 된다. 그러나 헌신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부족한 예배 공간의 확보를 위해 교회 전체가 주님께 물질을 드리자는 주장만으로도 충분하다. 수백 수천억원의 예배당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아마 불충분한 동기부여의 근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용을 위해 성경적 당위를 저버리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은 아니다. 돌로 화한 왜곡된 신학, 그곳에 지어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다. 당신들의 성전일 뿐이다.
칼빈의 말을 인용하겠다.
"...이것이 교회 건물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길일진대 우리는 여기서 그 건물들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여겨서 그곳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신다거나 - 여러 세기 전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 혹은 교회 건물들에 무슨 은밀한 거룩함 같은 것이 있어서 거기서 하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더 거룩하다는 식의 생각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들이 참된 하나님의 성전들이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부르려면 우리 속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어리석은 생각일랑 유대인들이나 이교도들에게 버려두자. 우리는 장소의 구별이 없이 "영과 진리로"(요4:23) 주님을 부르라는 명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기도를 드리고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이 세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진리가 가리어져 있었고 그림자 아래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살아 있는 실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 있으므로, 물질적인 성전에 집착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임재를 성전 벽 속에 가두어 두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참된 성전의 모습을 바라보도록 훈련시킬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와 스데반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서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신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엄히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사66:1 ; 행7:48-49) "
<기독교 강요> 제3권 20장 30.<<교회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임>>- 존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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