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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이전 에세이

[2013년]푸코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 소감

 

이 책은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꽤 난해하다. 단순한 예술론이 아니라 언어 문제와 결합된 예술론이라 더욱 그렇다. 언어는 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올 때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된다. 그만큼 근원적 구조를 밝히는 사유는 쉽지 않은 것이다. 푸코가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언어의 지시적 측면이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대상을 지시해준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도 텍스트는 여전히 지시의 의무를 행하지만, 그 지시는 관습적 용태에서 벗어나있다. 멀쩡하게 그려져 있는 파이프를 두고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니? 평범한 회화에 써진 단 한 줄의 텍스트가 모든 것을 혼돈에 빠뜨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를 못할 텍스트도 아니다. 푸코가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려진 파이프가 실제의 부피를 가진 파이프는 아니니까 말이다.

 

이런 탈관습적인 텍스트와 이미지의 배치가 발생시키는 예술적 효과에 대해 푸코는 말하고 싶어한듯하다. 그는 클레와 칸딘스키의 예술적 업적, 곧 재현으로서의 서양 회화 전통을 분쇄시킨 것을 마그리트가 더욱 급진적으로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탈근대 철학의 범주에 속하는 철학자인만큼, 푸코의 예술적 관심 또한 기존 예술에의 전복과 관련이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푸코가 재현으로서의 회화 전통을 마그리트의 그림을 토대로 전복시키는 미학적 작업은 예술의 영역에 만족하지 않고 곧 그의 권력 비판이라는 철학적 작업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 의문사항

 

1)푸코는 재현에 관한 두 가지 예술원칙이 15c에서 20c까지의 서양 회화를 지배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재현이란 것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적 대상에 대한 모방만을 뜻하는가, 아니면 예술작품 외부에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도덕 원칙 등과 같은 추상적 원리를 재현하는 것도 포괄하는 개념인가? 만약 전자의 범위에만 한정된 재현이라면 피라네시의 <장식문자>와 같은 이념적 그림은 재현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되지 않나?

 

2)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흐트러진 칼리그람으로 보았다. 즉 일단 칼리그람의 속성을 기본적으로 공유하되, 전통적 도식을 비튼 형태의 칼리그람이란 것이다. 그 근거로서 일단 회화에 써있는 글자는 실상 그려진 글자이며, 파이프 데생은 써진 데생이요 글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비약적인 주장이지 않을까? 텍스트는 그려지는데, 같은 종이에 있는 이미지는 써진 것이라니, 한 평면 위에 묘사된 텍스트와 데생을 굳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일관성이 떨어지는 설명방식이 아닌가? 텍스트가 그려진 것이라면 데생도 그려진 것이어야하고, 데생이 써진 것이라면 텍스트도 써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마그리트의 그림의 내적 논리에 부합하는 해석은 아닐까?

 

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언명이 데생으로서의 파이프와 현실세계의 파이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가? 그 한 줄의 텍스트가 발생시키는 부정의 효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그림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일상에서 경험해 온 목재 파이프가 떠오른다. 이것을 부인하는 예술론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지 아니한가? 마그리트의 그림은 현실의 재현을 거부한 그림일지라도, 감상자는 여전히 뇌 속에서 호출하는 파이프의 기억으로 인해 결코 재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닐까? 

 

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드러난 푸코의 예술론           

 

푸코는 마그리트의 그림으로부터 자신의 미학을 호출한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칼리그람을 비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칼리그람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텍스트와 이미지를 중복적으로 사용한다. 사물을 “이중적 서기라는 기법으로 사로잡”는 것인데, 텍스트 자체가 형상을 담지하는 표의문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이는 말이나 그림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사물 자체에의 접근을 위한, 다시말해 물자체에의 접속을 위한 강렬한 인식론적 욕망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 말과 그림의 겹겹 그물 안에서 주체의 인식 대상인 객체의 모습은 온전히 포획되는 듯하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표면적으로는 칼리그람과 무관해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텍스트는 이미지로 된 텍스트로서 그려진 언표이며, 데생은 쓰여진 이미지로서 글씨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렇듯 즉각적으로 인식되지는 않는 “칼리그람적 조작이 글씨와 데생을 교차”시켜 놓았다. 그리고는 평화롭게 칼리그람의 기능을 수행하려던 찰나, 어떤 강렬한 부정과 부인에 의해 칼리그람은 흐트러진다. 응당 데생을 지시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텍스트가 데생과의 연관성을 부정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로써 텍스트와 형상의 이중적 사슬로 사물 자체를 단단히 가둬놓으려던 칼리그람 본연의 기획은 좌절된다.

 

이와 함께 흐트러진 칼리그람에서는 데생과 텍스트 사이의 상호 배제를 통해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공통된 공간이 없어졌다. 형상의 위치와 텍스트의 위치가 엄격히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왕국을 자율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형상과 텍스트 사이에“이것은”으로 표시되는 불확실하고 미묘한 연결선이 그어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연결선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술어와 잇닿아 있다는 측면에서, 데생과 텍스트 간의 ‘긍정적’ 연결이 아닌 ‘부정적’ 연결일 뿐이다.      

 

이러한 마그리트의 비틀어진 칼리그람으로부터 서양회화를 지배해왔던 전통적인 두 가지의 예술 규칙과 그것들이 최종적으로 복무하는 상위의 예술 원칙이 붕괴된다. 그 두 가지 규칙은 첫째, 조형적 재현과 언어적 지시 사이의 분리와, 둘째, ‘유사하다는 사실’과‘재현적 관계가 있다는 확언’ 사이의 등가성이다. 전자는 가시적 공간의 재현을 위해 이미지 외의 텍스트가 회화에서 배제되어야 함을 뜻한다. 후자는 회화 형상은 그 형상이 닮으려하는 현실세계의 원본에 대한 모방물이라는 생각을 구현한다. 그러므로 위의 두 규칙은 예술이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어야 한다는 전통적 예술 원칙을 떠받드는 아틀라스의 두 팔이 된다.

 

그렇다면 결국 마그리트에게서 미학원칙을 도출하는 푸코의 예술론은 원본과 모방물 간의 위계질서를 깨뜨리는 전복적인 그것이다. “이것은” 원본으로서의 “파이프가 아니”기에, 우리는 데생으로서의 파이프를 또 하나의 독립적 실체로 대우하는 게 가능해진다. 현실이 현실로서의 진리를 드러낸다면,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의 진리를 묘출(描出)한다. 예술 외부의 현실과 이데아를 2차적, 3차적으로 구현할 때 주어지던 종속적 지위로부터 해방된 예술이기에 한층 자유로운 직관과 이념을 구가할 수 있다. 데생과 텍스트 사이의 여백은 전통의 칼리그람으로 표상됐던 사물 본체에의 추구를 내려놓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내려놓음은 재현에 대한 철학적 강박을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예술은 훨씬 가벼운 몸짓으로 재현으로서의 2차적 사물이 아닌, 오리지널의 1차적 사물을 생산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창조 행위가 되었다. 이것이 푸코가 원본과 모방물 사이의 위계를 파괴함으로써 성취하려 했던 예술의 진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