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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서적 리뷰

삼성의 비조, 호암 이병철이 창업을 하기까지 - 호암자전


호암자전 리뷰 : 삼성의 비조, 호암 이병철이 창업을 하기까지 





삼성이라는 굴지의 대기업을 일으킨 창업 군주 이병철(1910년 경남 의령 태생)에 대해 문뜩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건희 회장이 얼마 전 심장마비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 삼성의 초기 역사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건희가 이병철을 떠올리게 한 셈이다. 


반도체 사업, 스마트폰 사업에서 연이어 승승장구하며 삼성전자가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노키아 등을 단숨에 눌러버린 데는 이건희의 경영능력이 컸다. 그럼 이건희에 관한 자서전을 찾아봐야지 왜 이병철 자서전을 읽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인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이건희는 금수저를 입에 몇벌씩 물고 태어난 사람이다. 매우 풍족한 베이스에서 경영을 시작하고 그 경영을 성공으로 이끈 케이스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바닥부터 시작해 자수성가로 큰 사업을 일구려는 꿈나무들에게 이건희는 적절한 벤치마킹 대상이 아니다. 


외려 대재벌 창업주들의 청년기를 살펴보는 게 평범한 중산층 이하의 계급배경을 갖고 있는 창업가들에게 동기부여의 좋은 촉매재가 될 수 있다. 


그럼 ‘호암자전’에 나온 내용을 기반으로 사업을 시작하기까지 이병철의 유년, 청년기를 살펴보자. 


이병철은 정식 졸업장이 하나도 없다. 정주영처럼 집안이 가난해서가 아니었다. 호암의 집은 만석꾼 집안으로 농업시대의 준재벌이었다. 그가 졸업장이 없는 것은(물론 후에 삼성이 재벌이 된 후 여기저기서 명예 졸업장을 받긴 했다) 졸업하기 전에 잦은 전학을 가고, 후에는 건강 문제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호암은 5살 때 조부 이홍석(1838~1897)이 설립한 서당 문산정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때 한학에 출중하단 소리는 못들었지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향은 유난했다고 한다. 두서달이면 뗀다는 천자문을 1년 남짓이나 걸려서 겨우 마쳤다. 


서당을 다니던 중 11살이 되던 해, 당시 일본식 신식학교인 보통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진주의 지수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 이병철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서울의 보통학교로 전학가고 싶다는 뜻을 부모에게 내비친다. 


이병철의 부모는 흔쾌히 허락하고, 호암은 서울의 수송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보통학교에서 이병철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고 한다. 산술은 상위권이었지만, 조선어, 일본어, 창가, 도화 등에서는 낙제점을 겨우 면할 수준이어서, 전체 석차가 50명 중 35~40등 사이였다. 제도권 교육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성적이 좋지 못했음에도 이병철은 보통 학교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4학년을 마치고 방학 때 고향으로 귀성해서는, 보통학교 과정을 단기에 마무리 짓는 중학으로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이병철의 아버지는 학교를 자주 옮기는 자녀의 모습이 걱정스러웠지만, 결국 허락했다. 그래서 입학한 곳이 중동중학이었다. 그러니까 보통학교에서 졸업장을 따기 전에 중학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니, 보통학교 졸업장은 없었다. 


중동중학에서 열심히 수학하던 이병철은,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귀성해서는 이번엔 일본 유학을 가고 싶다고 선친에게 말했다. 선친은 “일에는 반드시 본말이 있고 시종이라는 것이 있다. 19세가 되고서도 아직 그것도 모르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중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또 상급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싶어하는 이병철의 조급함을 혼낸 것일 테다. 하지만 결국 며칠 후 일본 유학을 허락했다. 


도일한 이병철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다. 나름 열심히 대학 수업을 듣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책들도 읽으며 진지한 사색의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건강이 문제였다. 대학 2학년 말에 각기병에 걸려 1년간 휴학을 하고 온천욕 등 일본에서 요양을 적극적으로 해보지만, 효험이 없었다. 이병철은 결국 학업을 단념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조선으로 돌아온 이병철은 신기하게도 곧 건강을 회복했다. 


회복 후 이병철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올라와 여관에 자리를 잡고 옛친구들을 두루 만났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이병철이 취직을 한 것도 아니었다. 2년 가까운 서울생활 동안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놀고 지낸 셈이 되었다고 이병철은 회고한다. 


고향 중교리로 돌아갔지만, 집안 사업은 선친 지휘 아래 형이 담당해 자기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농촌에서는 생소한 새로운 종자를 재배해보려 일본에서 수입까지 해봤지만, 취미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성과가 없었다. 


졸업장도 없고, 취직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자 해보려던 농촌사업이 잘되지도 않았다. 이병철의 10대부터 20대 초중반까지는 별다른 성취가 없었다. 이병철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고향 친구들과 노름 골패에 몰두했다고 한다. 노름은 한밤중까지 계속되어 달그림자를 밟으며 늦게 집으로 들어오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이병철은 말한다. “실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운이 없는 것일까. 세상이 나쁜 것일까. 자성과 자제를 잃은 무위도식의 나날이 그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호암자전 42p)



1936년, 호암이 27살이던 어느 날, 이병철은 그날도 어김없이 골패 노름을 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조혼 풍습 때문에 호암은 17살에 결혼을 했고, 당시에는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달빛을 안고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는 순간, 너무 허송세월을 했다는 위기감이 그를 엄습했다. 뭐라도 해야한다, 뜻을 세워야 하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운 뜻이 사업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사업 아이템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빈곤에서 민족을 구하고 사내로서 큰 뜻을 세우는 데 사업만한 것이 없다고 호암은 생각했다. 


고민 끝에 마산에서 정미사업을 하기로 한 이병철은 선친에게 쌀 300석을 받고, 합천의 정현용, 박정원과 함께 각출후, 식산은행 마산지점에서 융자를 받아 공동사업을 시작했다. 1936년, 그렇게  27살의 청년 이병철은 생애 첫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첫 1년간은 손해만 봤다. 1년간 자본금의 3분2가 잠식되었다. 쌀을 매입시 시세가 올라갈 때 사고, 내릴 때 팔아서 원료 조달에 수지가 맞지 않는 것이 이유였다. 전략을 바꿔 시세가 오를 때 팔고, 내릴 때 사기 시작해 다음 1년 간은 흑자로 돌아섰다. 


향후 그가 삼성으로 성공을 이룬 후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치자.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사리느냐에 있다.”(호암자전 45p)


조혼 풍습이 있고,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짧고, 병역 문제도 없었던 20세기 초에 태어난 이병철에게 27살까지 뚜렷한 성취가 없었다는 것은 심적으로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주눅들지 않고 뜻을 세워 전진해나갔다. 우리도 조급할 필요 없다. 지금껏 이뤄온 게 없더라도, 앞으로 이루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