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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길' 토의 주제 1. 책을 읽고 느낀 점 나누기. 2. 하이에크는 현대문명의 기초가 개인주의라고 주장한다. 크리스트교와 그리스-로마 문명으로부터 사상의 맹아를 상속한 개인주의는 르네상스 때 만개하며 시민혁명 이후 주류적 정치 제도로 빚어진다. 이렇듯 서구문명은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성을 가졌다. 따라서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는 “서구문명의 진화 전체로부터의 예리한 단절”이다. 하이에크는 당시 영국에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에게 이 두 개념은 개인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다. 개인주의를 “개별 인간에 대한 존중, 즉 그 자신의 견해와 선호를 그 자신의 영역에서는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말이다. 하이에크에게 개인주의의 붕괴는 자유주의의.. 더보기
마광수, 윤동주를 발굴한 한국의 래리플린트 마광수씨가 향년 6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즐거운 사라’가 여전히 출판금지 상태인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의 죽음이 불러오는 비감은 너무 쓰라리다. 고루한 유교적 멘탈리티로 무장한 한국사회는 마광수가 떠난 이후에도 별 일 없다는듯 무정한 걸음을 이어갈 것이다. 마광수는 윤동주를 발굴한 문학이론가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던 순수한 시인의 진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가 야한 정신의 기수였던 마광수라는 점이 큰 역설로 다가온다. 하긴, 마광수를 등단시킨 박두진이 독실한 청교도였음을 상기해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겠다. 기본적으로 마광수의 예술은 대리배설, 카타르시스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예술이 반드시 관습적으로 아름다운 것, 윤리적인 것, 올바른 것에만 천착할 필요는 없었다. 더러운 .. 더보기
바리새인과 세리, 소수자들을 위하여 ▲ 세리들(이탈리아 작가 미상, 16세기경) (출처 : http://m.cpbc.co.kr/paper/view.php?cid=445034&path=201303)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도의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태도가 극명하게 상반되는 지점에서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많은 경우 바리새인이 독사의 자식이라는 힐난을 들을 때 세리는 예수와 식탁 교제를 한다. 여기에서 ‘불의를 보고 분노하는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편리하게 추출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분노하는 하나님’을 뒷받침하는 본문들은 공세적인 사회참여 사역의 지지대이다. 하지만 교회 성원들에 대한 신앙적 돌봄, 더 나아가 교회 성원 간의 관계 맺음의 방식을 구성하는 차원에서는 큰 실익이 있을지 의문 - 물론 이것이 사회참여 .. 더보기
[2013년]교회와 정글 - 영적인 강자만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사회 survival of the fittest : 적자생존 고기를 씹을 수 있는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우유와 무른 것만을 겨우 소화하는 연약한 신앙인도 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요 교회의 몸이다. 신앙이 강한 사람은 선인장에 비유할 수 있다.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고 비가 안내리는 긴 가뭄의 사막에서도 수분을 머금고 푸르름을 유지하며 버텨내는 선인장. 이 선인장 신앙인은 비우호적인 신앙 환경을 능히 초극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다. 아무리 설교가 실족을 유발하는 기괴한 내용을 담고 있어도, 불친절과 냉랭함이 교회를 휘감고 있어도, 성도들 개별 삶의 내용에 긍휼 아닌 정죄의 촉수부터 드리우는 분위기에서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이너서클의 전횡에 아가페(자비)는 실종되고 조건적 사랑인 필리아(우정)만이 편.. 더보기
[2012년]구약제사 기능이 결여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칭해 얻으려는 것은 종교적 아우라 성전이라는 단어가 가진 종교적 아우라는, 성경적으로 볼 때 성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속죄제사를 통해 이어주던 가교 역할과 뗄 수 없는 연접관계에 있다. 따라서 건물 성전이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종교적 기능을 상실함(새언약의 시대에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로 인해 구약적 제사와 그 제사를 감당하던 건물 성전의 기능이 폐지됨)과 동시에, 그것이 가진 종교적 함의와 강렬함 또한 소멸된다. 그러나 일부 한국 교회의 문제는 성경에 나와 있는 건물 성전의 종교적 아우라를 예배당에 투사하려한다는 것이다. 전술했듯이 성전의 아우라가 성립하려면 속죄제사 등의 구약적 제사 기능이 필요한데 그것 없이 예배당의 중요성을 구약적 성전의 중요성으로까지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오류라는 말이다. con) 구약의 제사 + 종교적 아우라 .. 더보기
[2012년]대화로 풀어본 성전용어 밑에 글은 "대화"의 형식을 사용해서 성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굵은 글씨로 쓰여진 것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대한 옹호의 주장이고, B의 말은 그것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A :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배 때 임하시는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B : 성전의 뜻 중 하나가 하나님의 집이고 따라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성전이라 칭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 예배당에만 계시지 않는다. 만물에 편재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따라서 예배당만을 성전이라고 하며 구별된 장소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만물이 그분의 집이요 그분의 성전이다. 그래서 이사야 66장 1절에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늘은 나의.. 더보기
[2010년]예수가 지은 새성전,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가 지은 새 성전, 하나님의 자녀들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점에서 우주가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이 됩니다(히3:4).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이 내뿜는 광휘는 죄의 잿가루가 뿌려진 탁한 대기 속에서 인간의 시야를 벗어납니다. 과연 만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며(롬3:23) 피조세계 전체가 탄식과 고통 속에서 해방을 기다립니다.(롬8:21-22)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스리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단지 통치 방식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타락 이후 하나님의 다스림은 인간의 영혼을 통한 내적 다스림이 아닌, 자연 법칙을 통한 외적 다스림으로 전환됩니다. 인격적 소통이 불가능한 고집 센 황소를 코뚜레에 메어 억지로 끌고 가는 형상이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소통 경로는 끊겼습.. 더보기
[2010년]하나님의 성전? 당신들의 성전! 너도나도 성전건축이 한창이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 시대에... 건물로서의 성전이 가졌던 본래 기능은 속죄제사를 통해 죄로 이격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동물의 피가 어찌 속죄기능을 할 수 있었으리요만은(히9:9b), 그 제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십자가 제사(히9:12)에 대한 예표로서(히9:9a) 의미와 기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죄 해결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출25:8;신12:5;왕상8:13;9:3) 영광스러운 임재(출40:34-35;왕상8:10-11)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성전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출25:22b),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사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 더 이상 건.. 더보기
[2013년]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 문화산업의 기만적 지배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근대성 비판의 핵심은 지배의 원리에 관한 것이다. 자기유지의 목적에 모든 것을 종속시킴으로써 목적에의 합리적 사유를 상실한 도구적 이성은 지배의 계기이자 원리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 도구적 이성은 체계화의 미명 하에 동일자의 원리로 만물을 획일화하고 주체로 환원한다. 요컨대 주체의 자기유지에 배타적으로 복무하는 도구적 이성은 만물에 추상적, 체계적 통일성을 부여하고 이 동일성의 원리를 매개로 세계를 지배한다. 이러한 근대적 지배는 문화의 영역에서도 마각을 드러낸다. 이 때의 지배는 겉으로 드러나는 야수적이고 폭압적 지배가 아닌, 교묘한 기만적 지배이다. 즉 피지배자가 지배의 원리를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행해지는 지배이다. 이렇듯 문화영역에서 기만적 지배가 가능해진 이유는 문화가 시장.. 더보기
[2013년]푸코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 소감 이 책은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꽤 난해하다. 단순한 예술론이 아니라 언어 문제와 결합된 예술론이라 더욱 그렇다. 언어는 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올 때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된다. 그만큼 근원적 구조를 밝히는 사유는 쉽지 않은 것이다. 푸코가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언어의 지시적 측면이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대상을 지시해준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도 텍스트는 여전히 지시의 의무를 행하지만, 그 지시는 관습적 용태에서 벗어나있다. 멀쩡하게 그려져 있는 파이프를 두고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니? 평범한 회화에 써진 단 한 줄의 텍스트가 모든 것을 혼돈에 빠뜨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를 못할 텍스트도 아니다. 푸코가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려.. 더보기
[2013년]은하철도999와 니체의 몸철학 은하철도 999는 기계 몸을 가질 것이냐, 생물학적 몸을 유지할 것이냐의 햄릿적 고민을 극의 종반까지 끌고 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몸에 관한 사유라는 측면에서, 니체의 몸철학을 빼닮은 면이 있다. 근대 철학이 이성적 특성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던 것은 인간을 인식론적 존재로서만 왜소하게 위축시키는 문제가 있었다. 여기에 저항하는 니체의 철학은 내부의 수많은 힘들이 부딪치고 각축하며 창조하는 "몸"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이 지닌 힘들을 통해 주어진 운명과 구조를 받아들이면서도 끝없이 분투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실현하는 것, 그것이 니체가 주장한 위버멘쉬, 넘어가는 자, 초인으로서의 삶이다. 이러한 위버멘쉬의 사상은 111화에 나온 메텔의 다음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더보기
[2013년]베를린 리포트 영화 베를린은 (수작임에 분명하다) 독일에 대해 내가 갖고있던 판타지를 여지없이 깨버렸다. 코미디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영화가 독일인을 그토록 얼빵하고 어리버리하게 그릴수 있겠는가. 한국영화이기에 가능한 패기다. 독일이 어떤 나라던가. 헤르만헤세의 이 를 기다리는 문학의 나라, 낭만의 나라이다. 그뿐이랴.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서린 춤사위 위에서 니체의 이 으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지성의 나라이다. 근대철학의 절정에 눈동자를 찍어올린 칸트와 헤겔의 나라, 철인의 나라이다. 비록 한때 나치즘이 발흥했지만, 나치즘으로 표상되는 근대의 야만성을 철학적 투쟁으로 분쇄시킨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이 있어 또한 아름다운 나라이다. 느슨하게 얽어맨 넥타이 사이로 슈바빙의 선선한 바람이 스며들며 학문과 예술을 논.. 더보기
[2013년]키에르케고어 : 대중은 비진리 키에르케고어는 단지 숫자만으로 진리를 주장하는 대중적, 군중적 사유를 비판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대중은 비진리"라고 말한다. 양적으로 많다는 이유만으로 또 단지 긴 역사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고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통속적' 철학이나 종교, 정치나 문화에 대해 키에르케고어는 반항한다. 여기에는 진리도, 진실도, 참된 윤리적 행위도, 이웃사랑도 없을 뿐 아니라 현실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고, 윤리적인 것은 주체적 결단 없이는 불가능하며, 주체적 결단에는 열정, 정열, 참여와 개입, 한 마디로 신앙이 필요함을 키에르케고어는 역설하고자 하였다. 그의 '단독자'는 신 앞에서 홀로 선 자이면서 동시에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겪을 수 있.. 더보기
[2012년]칼빈주의와 사회참여 웅장한 칼빈주의 체계를 아틀라스처럼 떠받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명한 이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신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해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외치지 않으신 영역은 단 한 평도 없다.”[1]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온 우주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 주권의 편만함(시33:6-15;24:1)을 신뢰함으로써, 칼빈주의는 기독교적 사회참여를 위한 든든한 신앙적 인준과 응원을 얻습니다. 강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칼빈 신학 내에서의 신앙이란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공적 영역”에까지 뻗어있기 때문입니다. 즉 칼빈주의가 지향하는 신앙적 관심의 범위는 하나님 주권의 광활함과 포개지는 것입니다. 신실한 칼빈주의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 더보기
[2012년]복음전도와 사회참여 간 신앙적 중요도의 위계 및 초대교회에의 적용 목차 I. 서론 II. 1. 신앙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들의 중요도에 대하여 (1) 결과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 분류 (2) 맥락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 분류 (3) 의미적 중요도에 따른 신앙 행위의 위계 분류 2. 사회참여는 신앙 행위인가 (1) 구약의 사회참여 (2) 예수의 병 치유 사역과 사회참여 (3) 권위에 반항하기 때문에 사회참여가 부적절하다는 주장에 대해 3.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1) 복음전도 - 교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전도 (2) 복음전도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공개적 전도 (3) 복음전도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비공개적 전도 (4) 사회참여 - 교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사회참여 (5) 사회참여 - 교회 외부에서 이뤄지는 공개적 사회참여 (6) 사회참여.. 더보기
[2012년]풀이과정이 필요한 용서 과정 없이 곧바로 용서를 할 수도 있다. 상대가 내 발을 실수로 버스에서 살짝 밟았을 때는 순식간에 용서할 수 있다. 이는 마치 1+1이라는 문제에 별다른 계산과정 없이 곧바로 답을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삶의 한 부분을 허물어뜨리는 엄청난 공격 앞에선 길고 긴 풀이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껏 내가 접해온 일반적인 교회문화는 최소한의 풀이과정도 없이 곧바로 연립방정식의 해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구약 선지서들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의 악행을 향한 야훼의 분노와 비난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 정이 떨어진다. 거의 매 선지서에 비슷하게 잔인한 신적 분노의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바로 그런 분노와 비난과 비판의 지루하고 섬뜩한 과정이 있었기에, 당신에게 숱하게 깊이 패인 상처를 준 피조물들을 .. 더보기
[2012년]리부트 된 추억. 배트맨 포에버, 그리고 다크나이트 라이즈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관에 갔던 게 95년도이다. 어떻게 이걸 기억하냐구? 그 때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였는데, 찾아보니 95년도 것이더라. 어릴 때 엄마 손잡고 잘 따라다니던 곳이 애경백화점이었다. 거기서 정기적으로 소프트 아이스크림 사먹는 게 내 삶에 안정감과 행복감을 주는 일종의 의식(ritual)이었던듯 하다. 그러던 어느날 텔레비전 만화로만 보던 배트맨이 애경백화점의 한쪽 면을 가득 메운 커다란 포스터에 실사로 박혀있는 게 눈에 띄었고, 엄마를 졸라 저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지. 처음 가보는 영화관은 일단 너무 어두웠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엄청난 크기의 사운드였다. 배트카가 뒷꽁무니에서 불을 뿜으며 질주를 하는데 그 소리에 귀가 터질것 같았다. 영.. 더보기
[2012년]역사의식 역사의식이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가치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판단이 무엇인가. 쉽게말해 어떤 대상에 대해 좋고 나쁨을 논하는 평가이고 규정이다. 종북주의 세력의 역사의식은 6.25전쟁을 미제국주의를 겨냥한 해방전쟁으로 정의한다. 박근혜의 역사의식은 5.16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규정한다. 뉴라이트의 역사의식은 일제 36년 식민을 조선 근대화의 과정으로 그린다. 미국 청교도들의 역사의식은 인디언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번져 있는 학살의 건국 연대기를 신의 인도와 축복의 과정으로 이야기한다. 굴절된 역사의식은 추상적 개념과 언술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를 방향짓는 구체적 힘으로 작동한다. 역사의식이 중요한 이유이다. 더보기
[2012년]김동호 목사의 고지론은 "결과주의"에 포획된 빗나간 사랑 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그분 주장의 요인즉 가난을 타파하고 약자를 돕기 위해서는 실질적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 물질에서 나오는데, 물질을 얻는 것은 세상에서의 높은 곳에 올라감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고지에 오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답지론과 고지론, 이 두 이론이 가진 오류는 신앙고백에 필수적이지 않은 요소를 필수화했다는 것이다. 고지를 택하든 저지를 택하든 그것은 선택과 관용의 영역이지 신앙인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될 십계명 같은 사안은 아니다. 성경의 프리즘이 분사하는 하나님 영광의 빛깔은 고지와 저지(미답지도 포함), 그리고 그 양극단 사이를 메우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폭넓게 뿜어내기 때문이다. 요셉은 고위직에 올랐을 때도 하나.. 더보기
[2012년]균형, 구도(求道), 그리고 사회 참여 우리는 균형있게 사유하고 행동하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균형이 삶과 사유의 궁극적 준거나 지향점이 될 수 있을까. 균형을 강조하는 성구를 보자. [잠 4: 27]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곧 균형을 가지란 소리다. 그런데 이 “치우치지 않음”이 복무하는 또 다른 가치가 있다.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로 표현된 진리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 균형이 종사해야 할 상위의 가치라는 것이다. 신명기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신 28:14]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균형이 필요한 이유를 신명기의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기 위함이라고.. 더보기
[2012년]잠언 말씀을 근거로 초중등교육기관에서의 체벌을 합리화하는 것에 대한 반박 기독교인 중 일부는 잠언 말씀을 근거로 초중등교육기관에서의 체벌이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요즘 서울시 청소년 인권조례안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체벌 금지에 대한 교회적 입장을 세우겠다며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들이 근거로 삼는 구절 중 대표적인 것은 이것이다. [잠 23:13]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잠언에서 채찍으로 때려 훈계하라고 했으니, 체벌이 합리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대로라면 정말 아이들을 “채찍”으로, 죽지 않을 만큼 많이 때려야 하는 게 성경적인 체벌이 된다. 그들은 잠언의 위 구절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 체벌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문자 .. 더보기
[2012년]이 시대의 젊은 아폴론들 그리스 신화에서 니체는 아폴론과 디오뉘소스를 대립시켰다. 아폴론이 정제되고 지적이며 이성적인 근대성의 화신이라면, 디오뉘소스는 정제되지 않고 정념적이며 무정형의 에너지를 머금은 원시적 생명력의 집약체이다. 반면에 나는 아폴론을 프로메테우스와 대립시키려 한다. 아폴론과 프로메테우스를 가르는 기점은 기존의 권위적인 권력집단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우선 아폴론이 속한 올림포스 12신 체제를 설명해야겠다. 올림포스12신 체제는 티탄과 기간테스,그리고 튀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공고화되었다. 티탄은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족속이다. 그들 중 어머니 가이아의 사주를 받은 티탄의 막내형제 크로노스가 어머니와 자식들을 억압하는 우라노스의 성기를 거세하였다. 그런데 티탄족이 권력을 잡은 후의 행태도 아버지 우.. 더보기
[2011년]푸코의 주체 푸코는 주체가 어떻게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는 지를 방대한 역사적 사료에 기반해 논증한다. 근대의 이성은 어떤 기준에 의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른다. 그런데 시대마다 분류 기준은 일정하지않다. 게다가 그 기준은 합리적이지도 않다. 각 시대의 특유한 사고는 에피스테메라고 불리는 비일관되고 무의식적인 인식틀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무의식적 인식의 기초, 구조에 의해 한 시대는 정상과 비정상, 동일성과 비동일성, 명확과 불명확을 경계짓고 경계 바깥의 것들을 배제한다. 이러한 경계짓기는 무의식적 구조와 함께, 지식권력, 생체권력을 수반한다. 즉 무의식의 인식 틀로 설정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현실적으로 유지시켜주는 데 권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지식은 비정상인을 정상의 바깥으로 예외시키는 권력의 작동을 정당화시.. 더보기
[2011년]라캉의 주체 프로이트가 학문적으로 정식화시킨 무의식의 개념은 기존의 통일적이고 조화로운 주체에 대한 근대 철학의 관점을 결정적으로 분쇄하는 데 기여하였다. 기존 철학에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의식 저변에서 의식에 강력한 규정력을 발휘하는 무의식의 발견은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가능케 했다. 의식만을 주체의 전부로 간주했을 때 주체란 인간 활동의 통일적 중심이다. 그러나 무의식이 개입하는 순간, 주체는 통일이 아닌 분열적 요소들의 결합물이 되며 더 이상 이성적 중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근대적 주체와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실존철학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은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실존 철학의 주체가 여전히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을 강조하는 반면, 프로이트의 주체는 무의식에 의해 포획되고 조종당하.. 더보기
[2011년]니체-전통적 주체의 해체 및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전복- 니체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역동하는 힘의 역학관계로 보았다. 사유와 의식의 지평 이전에 존재하는 힘들의 관계에 의해 인간과 세계가 규정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생각을 인간에 적용해보면, 기존 서구철학이 견지해온 고정적, 불변적 실체로서의 인간 주체가 해체된다. 끊임없는 생성작용으로서의 미분화된 힘들이 다수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인간 주체는 역시나 끊임없이 생성하며 변화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인간 행위와 현상 배후에서 그것을 떠받치는 불변적,동일적 실체는 없다. 그러나 서양 철학은 오랫동안 현상 배후의 본질적 실체, 고정적 기체를 상정해왔다. 이러한 서양 철학의 오류가 니체는 문법적 환상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 주어와 술어(동사)로 이루어진 문법 구조는 동작하고 행위하는 것의 배후에 주어가.. 더보기
[2011년]칼 폴라니의 경제적 자유주의 비판-거대한 전환-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의 원리로 구성한 자기 조정 시장을 사회조직의 제1원리로 삼는 이데올로기이다. 자유방임과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세계에서 시장은 자생적으로 발생했으며 그것의 유지와 발전은 자기 조정적이다. 요컨대 시장은 자연적으로 태어나 스스로 진화해나가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신념이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칼 폴라니의 비판은 자유 방임과 자기 조정 시장의 개념적 모순과 그것의 역사적 표출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칼 폴라니는 자기 조정 시장의 형성 및 유지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개념상 자기 모순이라고 일갈한다. 첫째로, 자기조정 시장 형성의 역사적 과정은 비자유주의적이었다. 자유방임적 자기 조정 시장, 곧 자.. 더보기
[2011년]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multitude)개념과 다중이 권력에 저항하는 방식 다중은 계급적 개념이다. 그러나 다중이라는 계급이 기존 계급과 다른 점은 그것의 포괄적 범위이다. 기존의 맑스주의에서 주장된 투쟁 주체로서의 계급은 노동계급인데, 이것은 배제적이고 좁은 의미의 계급이다. 산업 노동자만을 자본에 대한 대항 주체로서 유의미한 계급으로 상정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다중은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개념이다. 대중은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그 가장 풍부한 규정, 즉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규정”을 부여한다. 여기서 다중이 지닌 두 가지의 역설적 특징이 드러난다. 특이성과 공통성이 그것이다. 산업노동자뿐 아니라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빈자 등을 포괄하는 다중이기에 특이성이 드러나며 동시에 자본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억압의 공통성을 공유하.. 더보기
[2011년]맑스의 물신숭배(fetishism) 개념과 소외 그리고 대안 원래 물신숭배라는 용어는 원시 종교의 한 형태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자연적 사물에 초자연적 힘이 서려 있다고 믿고 그 사물을 숭배하는 것이 물신숭배라는 어휘의 용법이었다. 이것을 맑스가 거대한 상품 집적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새로운 기호로 전환시킨다. 상품에 녹아 있는 노동의 의미를 제거하고 노동에 담겨 있던 사회적 관계만을 추출하여 상품 고유의 특성으로 위조하는 것이 물신숭배이다. 상품이 담지한 노동은 상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추상화된 일반 노동을 뜻한다. 노동의 질적 요소를 소거하고 노동 시간이라는 양적 요소를 척도로 하여 상호적으로 비교 가능한 상품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자본주의이다. 비교 가능한 세계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상품 가치를 구성하는 추상화된 일반 노동은 사회적이다. 노동의 이러한.. 더보기
[2011년]헤파이스토스를 위하여 헤파이스토스는 올림포스 신이었지만 외모가 못났다. 절름발이였는데, 어린시절 부모인 제우스와 헤라가 싸울 때 엄마 역성을 들다가 화가 난 제우스에 의해 올림포스 밖으로 던져져 하루 종일 날아가다 렘노스 섬에 떨어지면서 그런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였다는 설도 있다. 나는 전자를 택하여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헤파이스토스를 엮어내는 단어는 장애와 재능이다. 그의 신체적 장애는 그를 둘러싼 가정환경의 구조적 장애, 즉 불화로부터 기인하였다. 제우스의 바람기와 헤라의 불붙는 질투가 격돌하는 가정은 어린 헤파이스토스에게 안정과 사랑의 공간 이전에 투쟁과 공포로 에워싸인 곳이었을 게다. 급기야 부부싸움의 유탄에 맞아 불구적 신체를 갖게 된 그. 똑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레스가 어린시절의 .. 더보기
[2011년]기독 유물론을 위하여(자유,인간본성,복지) 헤겔에 따르면 법의 기반은 자유의지이다. 어떤 무엇으로부터도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행위하고자 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자유의지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를 침해하는, 더 포괄적이게는 자유의지가 투여된 자유의 표현물들을 침해하는 것은 그 자유에 기반한 추상법에 대한 침해로서 불법이다. 거대한 추상법의 체계를 아틀라스처럼 떠받들고 있는 헤겔의 자유 개념은 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존엄함을 옹호하는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역사의 진보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그의 자유 개념은 혹독한 책임을 인간에게 부여하기도 한다. 헤겔은 법철학 57절에서 “누가 노예라고 한다면 이는 노예가 된 그의 의지 탓으로 돌려져야만 한다. 이는 마치 어떤 민족이 억압당하는 것이 그 민족의 의.. 더보기